울산 천전리 반구대(盤龜臺)에는 신석기 시대의 진기한 회화물이 남아 있다. 이집트 로제타스톤처럼 일관되고 뜻풀이가 가능한 화화문자는 아니지만, 고래·물개·사슴 등 수많은 동물이 그려져 있는 이 바위그림에서 석기인들의 생활상을 어렴풋하나마 짐작할 수 있다. 고대로부터 온 통신인 석기 시대의 모스 부호인 셈이다. 인근에 댐이 들어서 수몰된 탓에 갈수기 때만 모습을 드러내지만, 바위에 새겨진 그림 하나하나는 요즘 인터넷에서 새로운 문자로 진화하고 있는 이모티콘을 떠올리게 한다.
몇년 전 귀여니라는 필명을 가진 고등학생이 쓴 소설 ‘그놈은 멋있었다’라는 소설이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문장 곳곳에 섞여 있는 생경한 이모티콘을 비롯한 인터넷용 디지털 상형문자가 던져준 문화적 충격과 파장이 만만치 않았다. 이 새로운 글쓰기에 대해 한글 파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았지만 한편으로는 실험적인 표현 양식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많았다. 다시 말해서 이모티콘은 시각적인 표현 욕구가 강한 멀티미디어시대의 신세대가 만들어낸 창작물이고 이 같은 것은 과도기적 흐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화·방송·통신의 융합으로 기존의 문장도 문어체에서 구어체로 전이될 수밖에 없다는 게 논리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타당성이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 같은 사회병리학적인 현상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공감해야 한다는 논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최첨단 시대에 태어난 새로운 회화(이모티콘)문자가 동시대 언어 대중의 합의를 이루었다고 보기엔 너무 작위적이고 원칙이 없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익명성이 보장된, 개별화한 네티즌이 무의식적으로 퍼뜨린 표현 양식이나 언어가 여과 없이 온라인에 유통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마치 돌림병처럼 유행하다보니 문법을 무시한 온갖 표현물로 난무해 한글이 사막화하는 게 아닌가 걱정된다. 온갖 욕설과 상소리는 예사이고 국적 불명의 외래어와 의미 파악이 안 되는 소위 온라인용 축약어까지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다시 디지털 상형문자시대로 되돌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글과 말은 자신의 감정과 의사를 정확 신속하게 상대방과 소통하는 도구다. 하지만 인터넷에 떠도는 글을 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왜냐하면 이는 논리적인 글이 아니라 문장의 형식을 빌린 비논리적인 구호와 주절거림뿐이기 때문이다.
글로벌시대라고 하니까 멀쩡한 상호를 촌스럽다는 이유로 외국식 발음에 맞춰 뜯어 고쳐 국적 불명의 그것으로 개조했던 때가 있었다. 상호를 고쳐 외국 바이어들에게 환영을 받은 업체도 있겠지만 기업이나 기관들의 대외 이미지가 쇄신, 매출 증대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Y담으로 얼굴이 얽은 남자와 여자가 식당에서 곰탕과 갈비탕을 시켰더니 종업원이 주방에다 대고 큰 소리로 “곰보(곰탕 보통) 하나 갈보(갈비탕 보통) 하나”하고 외치는 바람에 식당이 소란스러웠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말 줄임이 심하면 부작용도 심하게 마련이다.
요즘 IT업계의 상호나 기관 명칭의 말 줄임 관행을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바쁜 세상에는 말을 짧게 하는 것도 미덕이다. 하지만 원칙 없이 줄이다 보니 되레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다. 예를 들어 한국전기사업자협회(전기사업자협)를 ‘한전협’이라 줄이면 과연 알아들어 먹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만약 한국게임산업협회(게임산업협)를 ‘한게협’이나 ‘게산협’으로 줄인다면 꽃게탕 식당 주인들의 주문전화 세례에 한동안 시달릴지도 모를 일이다. 대강 줄여도 IT업계에서는 알아듣는다지만 일반에 이미지를 뚜렷하게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상호 축약에도 각별하게 신경 써야 한다. 한글과 외국어가 병용 표기 될 수밖에 없는 글로벌 시대에는 상호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홍보하는 것이 곧 경쟁력의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서용범논설위원@전자신문, yb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