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SA는 일본의 가정용 게임기업계를 대표하는 컴퓨터엔터테인먼트협회(Computer Entertainment Supplier’s Association)로 게임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면 한번쯤 이름을 들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지난달 말에 도쿄에서 열린 ‘도쿄게임쇼(TGS)’를 참관하면서 이 행사를 주최하는 CESA 부스에서 2004년판 CESA게임백서를 한권 구입했다. CESA백서는 일본과 전세계 게임기 및 전용타이틀시장에 대한 각종 자료와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수록하고 있어 이 시장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많은 참조가 된다.
그런데 이번 CESA백서에는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의 출하, 판매 등과 관련된 데이터 수치보다 먼저 눈길을 끄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책자의 제1부인 게임업계의 트렌드와 동향코너에 ‘비장애인과 함께 즐기는 게임소프트웨어를’ ‘영화와 청소년 문제’ ‘게임은 문화유산이다’ ‘확산되는 게임시장’과 같은 다수의 칼럼 때문이었다.
맨 먼저 실린 ‘비장애인과 함께 즐기는 게임소프트웨어를’이라는 글은 일본장애자소프트사의 대표를 맡고 있는 다나구치 가즈타가씨가 기고한 것으로, 시각장애자를 위한 ‘스페이스 포 블라인드(Space For Blind)’의 개발에 관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70년대 후반에 아케이드 게임붐을 일으켰던 다이토사의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시각장애자용으로 개발하기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고 있었다.
다나구치씨는 ‘스페이스 포 블라인드’가 단지 시각장애인을 위한 특수한 게임이 아니라 시작장애인과 정상인이 함께 동일한 조건에서 게임을 할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을 도입했다는 데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의 글에 따르면 이 게임이 발매된 후 개인 시각장애자인들은 물론 맹인학교 등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싶다는 문의가 쇄도할 정도로 좋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20대까지 정상인이었던 다나구치씨는 게임회사들이 관심을 가져준다면 게임을 즐기는 것으로 부터 소외되는 사람이 없을 것이며, 게임이 장애인과 정상인의 벽을 허무는데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타나구치씨는 글의 마지막에 시장성을 고려하기 어려운 시각장애자용 게임 개발에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저작권을 무상으로 흔쾌히 제공해 준 타이토사에 대한 감사를 잊지않았다.
이글에 이어 읽어본 ‘게임은 문화유산이다’라는 칼럼은 일본 보스텍사가 추진하고 있는 ‘EGG(Engrossing Game Gallery)프로젝트’에 관한 것이었다. EGG프로젝트는 간단히 말하면 에뮬레이터로 70년대부터 등장했던 고전게임을 복원·복간하는 사업이다.
즉 시장에 나오는 게임 타이틀은 연간 수천종이 되지만 그 수명이 수개월이면 마감되고, 그나마 인기없은 제품들은 흔적조차 없이 잊혀져 간다는 것에 대한 게이머들의 아쉬움이 모여 프로젝트가 된 것이다.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보스텍은 게임마니아나 수집가들의 도움을 받아 ‘MSX’나 ‘PC 9800’시리즈 시절에 나온 게임들의 소스를 확보하여 마치 문화유산을 복원하듯이 하나하나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채산성만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일들이다.
시각장애자들에 대한 게임회사들의 관심과 배려, 그리고 상품성을 떠난 개발자들의 노력을 기억하려는 일본게임업계의 모습은 매우 성숙해 보였다.
집에 돌아온 후 책장에 꽂혀 있는 90년대의 국산 PC게임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이러한 패키지 하나하나가 한국게임 산업사를 기록하는 소중한 자료가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형오 한국게임산업협회 부회장 hoyoo83@gamek.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