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무조정실은 참여정부가 수행중인 정책 중 최고작으로 EBS 수능과외방송을 꼽았다. 사교육비 경감을 위해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는 점과 IT강국으로서의 장점을 최대한 살렸다는 점이 특히 부각되었다고 한다. 며칠 전에 치러진 2차 수능모의고사 이후에도 EBS 수능방송의 높은 적중률에 대한 홍보가 이루어졌고 11월 수능에서는 그 비율이 더 올라갈 것이라고들 한다.
교육부는 더 나아가 e러닝 교육법을 제정하겠다고 나서면서 산자부가 주관해 제정한 e러닝산업진흥법과의 대립각까지 세우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교육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들이 특별한 소란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내가 지금 헛것을 보겠거니 한다.
그래도 한 가지만은 짚어보고 싶다. EBS 수능과외방송이 과연 e러닝인가 하는 점이다. 이에 관한 질문과 답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IT강국의 장점을 극대화한 정책인 이상 그것은 교육과 IT가 만나는 핵심 코드인 e러닝을 바르게 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e러닝은 아직 확립되지 않은 개념이며 지식사회를 열어가는 화두로서 지금도 세계적으로 진행중이다. 그러므로 IT강자를 넘어서서 지도자로서의 책무를 부여받고 있는 한국은 e러닝의 표준을 세우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부지불식간 헛것에 홀려 표준이랍시고 내놓으면 이내 세계는 한국의 e러닝을 외면하고 말 것이다.
e러닝은 대체로 IT기술을 교육에 활용함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교육체제로 이해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는 이와 같은 초보적 개념을 넘어서야 한다. e러닝이 기반을 두고 있는 지식공간의 핵심적인 두 가지 특성은 유비쿼터스 공간과 디지털코드다. 우선 유비쿼터스 공간에서는 교수자와 학습자 간에 거리가 없는 것을 전제한다. 현재까지의 e러닝은 이러한 접근성 개념에서 이해돼 왔으며, EBS 수능과외방송도 이런 점에서는 훌륭한 e러닝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e러닝은 디지털코드의 속성 이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디지털 코드는 연속성에 기반해 정보를 선형으로 전달하는 아날로그코드와는 다르게 불연속적으로 배열된 점으로 정보를 전달한다. 점과 점 간의 연결정보만을 가지고 있으면 불연속적으로 전달된 정보들은 언제든지 연속선상에 재배열된다. 디지털코드에 맞춘 e러닝체제에서는 교수자와 학습자 간의 구분도 없으며 학습내용의 선후도 없다. 오로지 학습자와 교수자는 N 대 N으로 무한히 확대된 유비쿼터스공간에서 1 대 1의 일촌관계로 만날 뿐이다. 상징적으로 표현하면 무한한 우주공간에서 수억광년 떨어진 두 별이 실시간으로 만나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이미 이러한 e러닝 체제에 들어와 있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EBS 수능과외방송은 그 주인공이 아니다. 주인공은 네이버 지식인과 다음카페와 싸이월드와 블로그다. 이들이 만들어 가는 공간에서는 만인이 교수자이고 만인이 학습자다. 유일 최고의 지식도, 지식인도 없다. 끝없이 변하고 축적돼 갈 뿐이다. 정보철학자 피에르 레비에 의하면 집단지성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지, 어디에선지는 모르지만 내게 딱 맞는 지식을 유비쿼터스 공간에 올려주고 나는 그것을 배워 또 새로운 지식 한 올 한 땀을 올려 놓는다. 그러면 나는 언젠가 어느 분야에서 내공이 커져 있고 싸이월드에서 나와 일촌을 맺는 블로거들이 수없이 많아지면서 바라바시의 말대로 나의 미니홈피는 네트워크의 허브가 되어버린다. 바로 이런 세계가 e러닝의 세계며 지식정보사회의 미래다. 그저 흐뭇해야 할 일은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가 이미 이러한 세계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EBS수능과외는 어떠한가. 그것은 일종의 독점체제다. 표준화되고 거의 획일화된 교과지식을 정해 놓고 스타강사가 수십만명을 대상으로 일방적인 방송을 쏟아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수십만명이 동일한 내용의 학습을 할 수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가정을 하고 있다. 이는 해방된 학습공간을 만들기보다는 IT기술을 이용해 또 다른 독점적이고 억압적인 교육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는 것 아닌가. 11월이 지나면 수능시험적중률을 내세워 정책의 성공지표로 삼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씁쓸해진다. 혹시나 한 발 더 나아가서 세계만방에 e러닝 성공사례로 선전할까 두렵기까지 하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바늘 허리에 실을 맬 수는 없다. 제발 다시 한번 생각했으면 한다. 내공도 없는 사이비네티즌이 오프라인의 권세를 이용해 온라인 세계를 왜곡시키도록 놔두어서는 안된다. 한국의 네티즌이 좀더 내공쌓기와 일촌맺기에 열심을 낼 때 e러닝의 세계표준은 만들어질 것이다.
<천세영 충남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sychun@c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