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휴대폰 업체인 A는 유럽의 한 유통업체로부터 100억원 규모의 휴대폰 물량을 주문받았다. 이 업체의 여신 한도는 200억원. 하지만 주거래 은행이 여신한도를 50% 가량 축소, 100억원을 회수하는 바람에 운영자금 및 자재구매 비용의 한계에 봉착했다. 결국 일부 주문 물량을 포기하고 말았다. 휴대폰 업체인 B사도 최근 10만대 가량의 휴대폰 공급계약을 했다. 하지만 거래은행인 외국계 은행이 시장상황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여신을 확대해 주지 않아 주문량 자체를 소화하지 못했다. 최근 잘나가는 업체로 소문난 C·D업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중견·중소 휴대폰업계의 수출길도 봉쇄됐다. 은행들이 휴대폰 경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삼성·LG·팬택 등 3사를 제외한 휴대폰업계의 여신 등급을 대폭 낮췄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산 휴대폰에 대한 인식이 업그레이드되면서 카메라폰 등 고가 휴대폰에 대한 해외 주문이 밀려들고 있지만 자재대금을 확보하지 못해 주문량 소화를 못하는 사태가 속속 터져 나오고 있다.
◇여신 최고 50∼60% 축소=외국계 은행이 특히 심하다.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주인이 외국인으로 바뀐 외국계 은행의 경우 삼성·LG·팬택계열 등을 제외한 중견·중소업체의 여신을 대폭 줄였다. 20∼30%를 넘어 최고 50∼60% 가량 여신을 축소하는 사례가 일상화됐다. 국내 은행도 마찬가지다. 시중은행은 물론 국책은행도 마찬가지다. E은행의 한 여신담당자는 “은행으로선 기업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면 당연한 조치가 아니냐”면서도 “휴대폰업체의 경우는 대기업과 중견기업이 양극화 현상을 겪으면서 윗선에서 특히 관심을 가져 어찌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세원·텔슨 사태 이후 “심화”=A기업은 세원텔레콤과 텔슨전자의 법정관리 및 화의신청 이후 특히 심해졌다고 토로했다. A기업의 한 임원은 “처음엔 여신한도 축소 운운이 남의 얘긴 줄 알았으나 직접 당하고 보니 할 말이 없다”면서 “어렵게 오더를 받아오더라도 여신을 확대할 수 없어 사업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밝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중견·중소 휴대폰업체들은 종자돈마저 여신한도 축소에 따른 대출금을 갚는 데 충당하고 있다. B업체 관계자는 “유럽과 동남아에 휴대폰을 공급해야 하지만, 부품 구매 자금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매출을 올리는 족족 은행권에 돈을 갚느라 자재대금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부에 대한 원성도 높아졌다. C업체 관계자는 “정부로부터 직접 지원은 바라지도 않지만 금융권이 앞장서 여신을 축소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그렇더라도 수출계약건에 맞게 여신을 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아예 휴대폰업체라면 실적이나 주문계약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 않으려는 게 지금 은행의 현실”이라며 “우량기업이나 통신사업자의 자회사인 경우도 여신을 축소하기는 마찬가지”라고 실상을 비판했다.
◇대책은 없나=업계는 정부가 나서줄 것을 요구했다. 얼마 전 정부가 앞장서 중견·중소업체의 어려움을 타개해 준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금이 필요한 우량기업은 제쳐 두고 구색 맞추기 위한 업체들의 목소리만 청취하는 흉내를 냈다는 게 기업들의 불만이다. 적어도 수출계약건에 대해서만이라도 수출입은행이나 산업은행 등을 활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는 것이다.
휴대폰 D사의 한 임원은 “하반기 들어 고가 휴대폰 주문량이 늘어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자금여력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며 “우량기업을 대상으로 한 정부 특단의 대책이 없을 경우 해외기업과 인수합병(M&A)에 나서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앉아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박승정기자@전자신문, sj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