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이 시대를 살아가는 미덕

 곱게 물든 단풍 길을 따라가다가 산사에서 하룻밤을 보낸 일이 있다. 동행이 절집 큰 스님과 잘 알고 있던 터라 곁다리로 스님이 거처하는 툇마루에 앉아 오랜만에 새카만 밤 하늘에 메밀꽃처럼 피어난 별밭을 구경하며 녹차를 얻어먹는 호사까지 누렸다. 연치가 일흔을 훌쩍 넘겼다는 큰 스님은 첫말부터가 엉뚱했다. 처사도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서 속끓이를 하느냐는 것이다. 거창한 법어를 들을 요량은 아니었지만 어째 큰 스님이 속세간의 이야기를 물어보는 게 어색했다. “속세의 잡티가 숲이 울울창창한 이곳까지 날아옵니까”하고 물었더니 신도들이 새처럼 물어다 줘 귀동냥한 것이라며 씁쓸하게 웃는다. 절집이라는 곳도 마음의 찌꺼기를 내버리는 곳이니 월급쟁이와 사업하는 신도들의 분노와 슬픔, 좌절감 따위의 하소연이 스님의 가슴에도 고스란히 쌓여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치 절집 주변 곳곳에 쌓아올려진 서낭 돌무더기처럼. 요사채 뒤로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좀 시끄럽게 들린다고 싶었는데 그런 내 생각을 눈치 챘는지 스님이 덧붙인다.

 좋은 소리도 한참 듣다보면 악마구리 같을 때가 있지. 요즘 세상이 그렇거든. 산에 묻혀 염불 외는 늙은이가 뭘 알겠소만 참 큰일이오. 우리나라 사람들 머리 좋고 심성 착한 중생인데 문제는 입을 제대로 관리를 못하니 난리지. 다들 잘 났으니 한 마디씩은 해야 겠고, 그러다보니 제 마음 같지 않은 사람들이 온통 머저리로 보이겠지. 남들 한 수 가르치려는 보살심(?)을 내다보니 또 한바탕 말 싸움에 세상이 시끌시끌, 그러니 불면증에 걸릴 수밖에. 하릴없이 산채나 씹으며 허송세월하는 스님네가 글로벌시대 같은 어려운 말을 알기나 하겠소만 나라일 생각하면 답답하지. 제 잘난 척 떠벌린 구업(口業) 때문이요. 세상 일에 딱 들어맞는 답이 어디 있겠소. 정답이란 게 없거든. 헌데 다들 제가 떠드는 게 정답인 줄 알고 목소리를 높인다 말이야. 감감 산중에 앉으면 새소리와 계곡 물 흐르는 소리에 세월 가는 줄 모르는데 요즘은 세상 잡소리 때문에 일주문 근방까지 소란스러워. 겉똑똑이들 버릇 어디 가나. 어쩌다 신문을 보면 투명성인가 뭔가 하는 돋보기를 들이대고 서양 사람이 우리 기업들의 내부를 관찰하며 경영권까지 넘보는 모양입디다. 피땀 흘려 만들어 놓은 첨단산업체를 외국에 헐값으로 내놓으면서도 무조건 시장논리를 들이댄단 말이요. 미국이나 중국 같은 나라도 알짜는 몰래 숨겨두고 그렇게는 하지 않을 거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은 그쪽 이론에만 종속되어 이쪽 사정은 생각하지 않아요. 순혈주의에 물들어 지연·학연에 목매고 있는 사람들이 글로벌이니 신경제니 시장논리를 입에 담고 있는 걸 보면 좀 민망하지. 산업스파이라든가 뭐라나, 돈 몇 푼에 눈이 멀어 제가 쓴 시험답안지를 남에게 보여주는 멍청한 사람들도 많다더군. 남들은 하나하나 이쪽을 캐고 있는데 우리는 대체 남에 대해 뭘 알고 있나. 미국 사람 기질을 알고 있나 일본 사람 심리를 꿰뚫고 있나. 사람을 모르면 되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우리 중생들은 잘 모르거든.

 스님과 차를 마시다 보니 마치 조선시대의 낯 모를 승병장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지금이 정말 난세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행정수도 이전 특별법의 위헌 판결을 놓고 ‘관습법’이라는 말이 도마에 올라 난도질 당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수용 의사를 밝혀 일단 수습은 되었지만 겉불만 진화됐지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경기 진작책으로 내놓은 한국판 뉴딜정책에 대해서도 입씨름은 여전하다. 국론 분열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여간 걱정이 아니다. 정부 정책은 나올 때마다 물어뜯겨 청사진이 발기발기 찢겨지는 등 숫제 벼르고 벼른 시비거리다. 이제 그만하면 됐다. 한국이라는 배가 어디로 항해하는지 사공들도 젓던 노를 잠시 놓고 서서, 입에 빗장을 지른 채 바다의 물살과 풍향을 진지하게 살펴보는 것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서용범논설위원@전자신문, yb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