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자 이듬해인 1849년 미국 각지에서 8만여 명의 사람들이 서부로 서부로 밀려 들었다. 골드러시의 원조인 이들을 통칭하는 말이 포티나이너(49er)다. 이들은 여러 부류이긴 했지만 대부분 가난한데다 개인적인 성향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미국이 자랑하는 개척자 정신은 바로 이런 출신 성분과 성향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데드우드·덴버 등 서부 도시들의 급성장도 이런 배경을 갖고 있다. 샌프란시스코가 근거지인 미식축구단 포티나이너스의 명칭은 샌프란시스코가 이런 배경 속에서 급성장했음을 말해준다.
포티나이너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들이 머무는 야영지나 마을은 다양한 부류와 출신으로 구성돼 있었으므로 각종 의사결정 과정에 ‘투표’나 ‘다수결’과 같은 민주주의 요소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포티나이너의 운명은 기복이 심했다. 금이 쏟아지는 동안 그들이 사는 마을이나 도시는 급속하게 팽창해갔지만 금이 더 나오지 않으면 폐광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열악한 환경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은 보통이고 영양실조와 토착 인디언들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는 일도 잦았다. 서부영화에서는 자신들이 캐낸 금이 결국은 극소수 자본가의 배만 불려주는 데 대한 포티나이너의 분노가 소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동굴에서, 계곡에서 금을 찾는 한 포티나이너에게 클레멘타인이라는 딸이 있었네…’라며 시작되는 미국민요 ‘오마이 달링 클레멘타인’은 이런 포티나이너의 허탈감과 자조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터넷 벤처 기업인들을 포티나이너에 비교한 이가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게이츠다. 닷컴 붐이 한창이었을 때 그는 “골드러시 때 돈을 번 것은 포티나이너에게 총과 맥주와 청바지를 팔았던 극소수 장사꾼이었다”는 말로 닷컴비즈니스의 허상을 정확하게 꼬집었다.
요즘 우리 IT업계에 몰아닥친 불황의 늪은 수많은 코리언 포티나이너를 죽어가게 방치한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포티나이너의 개척자 정신이야 말로 진정한 경제적 가치이며 국부의 원천이 되는 사회적 분위기와 정책이 아쉽다.
디지털문화부·서현진부장, jsu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