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시장을 상대로 영업하는 글로벌 IT기업들에 뉴욕증권거래소와 나스닥은 꼭 진출하고 싶은 꿈의 무대 중 하나다. 금융 시장의 메카로 일컬어지는 월스트리트에서 자본을 조달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경영자의 마음은 들뜨게 마련이다. 게다가 미 증시 상장은 투명한 지배구조나 견실한 재무구조를 전세계 투자자로부터 검증받는다는 의미도 있다. 이 같은 이유로 글로벌 기업 중에는 자국 증시와 함께 미 증시에도 주식을 상장하는, 이른바 ‘이중 상장((Dual-listing)’ 기업이 꽤 많다.
하지만 월스트리트는 글로벌 기업들에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상장 준비 단계부터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엄격한 규제를 받아야 하는 데다 엔론과 월드컴의 대규모 회계부정 사태 후 제정된 사베인스·옥슬리법의 본격 시행으로 내부자 거래와 분식회계에 대한 제재가 강화돼 내부통제 비용이 만만치 않다.
최근 영국 BT그룹의 크리스토퍼 블랜드 회장이 “선택할 수 있다면 미국에서 상장 폐지를 하고 싶다”는 의견을 은연중 피력한 것도 이 같은 규제비용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베인스·옥슬리법 등 미국 법규를 준수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장 1860만달러의 규제 관련 비용을 쏟아부어야 한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물론 미국인 주주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달러 표시 회사채를 대량 발행하고 있는 BT로서는 상장 폐지라는 극약 처방을 쓰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비단 BT뿐만 아니다. 미국에 상장된 DAX(독일 거래소 지수) 30대 기업 중 절반 가량이 미국에서 상장 폐지를 원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지멘스의 한 임원은 상장 폐지를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웬만큼 경영투명성을 확보했다고 자부하는 유럽 기업들조차 미국에서 이 같은 사정임을 감안하면 기업하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을 새삼 느낀다.
장길수 국제기획부장 ks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