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매체 다채널시대로 대변되는 오늘날의 방송사업은 방송물을 실어 나르는 망 사업, 그 망을 이용하여 방송을 송신하는 송신사업, 방송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업, 방송 콘텐츠를 모아서 제공하는 사업 등으로 분화하고 있다. 지금까지 방송계의 대표주자 지위를 점하고 있는 지상파 방송사업자가 이 모든 것을 수행하고 있으나, 앞으로는 환경의 변화로 세분화 추세가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러 방송사업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역시 방송 콘텐츠산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망을 잘 구축하고 송신설비를 잘 갖춘다 하더라도 내보낼 방송 콘텐츠가 없다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망과 송출장비 등이 극히 제한적이던 과거에는 방송사업을 위해서는 먼저 송신설비를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나 지금의 방송산업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콘텐츠의 확보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제작능력이다.
오늘날 기술발전과 투자여건의 향상으로 인하여 방송 콘텐츠를 송신할 수 있는 전기통신설비의 성능이 훨씬 좋아졌고 광범위하게 구축되고 있다. 즉, 지상파망, 케이블망, 위성망, 이동수신망, 유무선인터넷망, 광대역통합망 등에서 보듯이 방송 콘텐츠 송신망이 다양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 망의 다양화와 고도화는 방송 콘텐츠 수요를 대폭 증대시키고 있다. 최근에는 한류 열풍까지 가세, 외국의 한국 방송 콘텐츠 수요도 부쩍 늘고 있다. 하지만 콘텐츠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의 제작산업은 그 수요에 부응하기에 너무 미흡하다. 방송정책적인 입장에서 볼 때, 새로운 전송로에 의한 신규매체는 새 콘텐츠를 주로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야 새로운 서비스로서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새로운 방송 서비스가 생겨도 새 콘텐츠가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콘텐츠, 특히 지상파가 제작한 콘텐츠가 주로 제공되고 있다. 유선방송이든 위성방송이든 지상파 방송의 재송신 채널들과 지상파의 자회사 채널들이 주도하고 있다. 조만간 도입될 이동멀티미디어방송(DMB)은 사상 최초로 ‘이동 휴대방송’시대를 이끌 신규매체지만, 지상파방송의 재송신이 핵심서비스가 되지 않으면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는 의견이 끊이지 않는다. 방송정책적인 관점에서 지상파 방송의 독과점 해소를 통한 다양성 구현과 매체 간 균형발전을 아무리 외쳐봐야 공염불이 될 위기감마저 든다.
왜 이런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우수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일이 어렵고 그 기반도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질 높은 방송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유능한 인력이 부족하고 무엇보다 성공의 가능성이 확실하지 않은 콘텐츠에 투자하기보다는 안전하게 지상파 방송사의 콘텐츠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런 자세로는 방송산업의 진정한 발전을 이룩할 수 없다. 신규방송서비스의 도입을 통하여 방송산업이 발전하고, 궁극적으로 국민복지향상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콘텐츠를 위한 치열한 노력이 도입단계에서부터 필요하다.
방송통신융합시대에 즈음하여, 방송사업에 진입하고자 하는 통신사업자도 망을 구축하고 송출하는 일에만 매달리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는 방송 콘텐츠 제작에 과감하게 투자하고 지원하는 모습이 필요할 때다. 콘텐츠 생산에 기여하지 않은 채 방송물의 제공을 통해 산업적 이익을 추구하려 한다면 융합시대에 공존공영의 길은 멀다. 방송과 통신의 융합시대에는 통신사업자와 같이 자본이 풍부한 사업자야말로 좋은 콘텐츠를 위해 기여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물론 방송콘텐츠 제작의 활성화를 위해 그러한 지원과 투자가 가능하도록 제도적, 재정적 뒷받침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은 방송위원회의 몫이라 하겠다.
<이효성 방송위원회 부위원장 hslee@kbc.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