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바람이 차가워진다 싶더니 어느덧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준비할 때가 됐다. 이맘 때면 도심 곳곳에 어김없이 구세군 자선냄비가 등장한다. 힘겹게 겨울을 나고 있는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것이다. 해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설치되는 ‘사랑의 체감 온도 탑’도 지난 1일 설치됐다. 온도 탑의 올해 목표액은 921억원으로 9억2100만원이 모일 때마다 눈금이 1도씩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모금 추세로 보아 수은주가 맨 위 눈금을 넘어설 것 같다고 한다. 아직 우리 사회가 따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흐뭇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비단 자선냄비나 사랑의 체감 온도 탑이 아니더라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회 구석구석에서 남모르게 선행을 베푸는 이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다 하더라도 이웃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이 곳곳에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겨울이 아무리 추울지라도 포근한 마음으로 봄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나라 경제에도 사계절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올해에는 특히 내수경기가 바닥에서 좀체 헤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그런지 겨울 추위가 더 매섭게 느껴진다. 이럴 때일수록 내수경기 진작도 긴요하지만 나라 밖에서 경제의 활로를 찾는 일도 그 못지 않게 절실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올 하반기 지구촌 구석구석을 집중적으로 돌며 국가 세일즈에 중점을 둔 정상 외교를 펼쳤다. 최근에는 영국·프랑스·폴란드 등 주요 유럽국가들을 순방하며, 첨단기술과 생산력을 지닌 한국의 위상을 정보기술(IT) 위주로 한껏 홍보하고 돌아왔다. 귀로에 자이툰 부대를 전격적으로 방문함으로써 따뜻한 뉴스를 온 국민에게 안겨 주기도 했다.
대통령의 이번 유럽 방문길에 수행한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은 ‘보고 느끼는 IT협력’이란 기치를 내걸고 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DMB) 기술 시연회를 열어 영국과 프랑스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 △영국 케임브리지대-한국전자통신연구원 간 공동연구센터 설립 △통신장비 업체 프랑스 알카텔의 연구개발(R&D)센터 한국 유치 등 많은 성과를 올렸다.
진 장관은 유럽 순방을 떠나기 직전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있는 한국정보보호진흥원(KISA)을 방문해 KISA 그리고 정보통신윤리위원회(ICEC) 직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KISA와 ICEC는 둘 다 안전한 디지털 세상의 구현을 목표로 일하는 기관이어서 사람으로 치자면 사촌 간이나 마찬가지다.
정보통신부가 1인당 소득 2만달러 시대를 앞당기는 성장의 견인차로 IT를 집중 육성하겠다며 들고 나온 ‘IT839전략’ 그리고 그 전략의 추진에 따라 우리 앞에 속속 모습을 드러낼 ‘u-코리아’의 미래상 등을 놓고 두 기관의 젊은 연구원들과 정보통신부 장관이 열띤 토의를 거듭하던 끝에 어느덧 간담회를 마칠 시간이 됐다. 그러자 진 장관이 2005년 정보통신의 화두로 불쑥 ‘따뜻한 디지털’을 제안했다.
우리는 그간 IT를 지나치게 성장전략이라는 측면에서만 파악해 왔다. IT산업이 우리나라 수출의 3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성장 버팀목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IT 강국 코리아는 이제 IT를 보는 시각을 좀더 성숙한 것으로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다. IT839전략이 차질 없이 이행되다 보면 우리 사회 IT환경은 과거에 미처 생각할 수 없었던 수준으로 급속하게 발전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칫 IT의 핵심을 이루는 디지털의 차가운 속성을 당연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도 있다.
장관이 공개적으로 꺼내 놓은 IT화두 ‘따뜻한 디지털’은 안전하고 편리한 IT기반이 전제조건이 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정보보호 개념이 밑바탕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KISA가 내년도 슬로건을 ‘따뜻하고 편안한 디지털’이라고 나름대로 정한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 출발한다. 디지털이 차가워야만 한다는 법이 어디 있는가.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인간의 얼굴을 한 디지털, 다시 말해 ‘따뜻한 디지털’을 가꾸어 보자.
<이홍섭 정보보호진흥원장 hslee@kis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