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본론`에 충실한 사회로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는 말이 있다. 법이 없어도 호적에 빨간 줄 가지 않고 인생 꼬이지 않게 살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진신(眞身) 중에서, 그것도 가운데 토막이라면 얼마나 무량한 자비가 담겨 있을지 짐작이 간다. 그것뿐이랴. 잘 요리한 생선의 가운데 토막 역시 식도락 측면에서는 자비로운 제물일 것이다. 어두육미라는 말에는 가부장의 수상쩍은 저의가 숨어 있다. 남편과 자식에 지극 정성인 조선 여인네 아사녀의 희생적인 고운 심성과 그것을 암묵적으로 방조했던 아사달의 묵계인 것이다.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처럼, 요즘 그 ‘가운데 토막’이 사라지고 있음을 경고하는 듯한 광고 카피가 텔레비전에 종종 등장하고 있다. 휴대폰 카메라로 스캔하면 피사체의 엑기스 부분(가운데 토막)이 마술처럼 사라진다는 광고 컨셉트는 묘한 이질감과 함께 충격적이고 신선한 느낌을 전해 준다. 사라져버린 가운데 토막은 대체 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 물론 답은 휴대폰 칩 속이다. 하지만 광고가 던지는 메시지를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가운데만 잘려나간 피사체의 시각적 부조화 때문에 정체 모를 상실감의 함정에 곧잘 빠져 든다.

 광고 속의 휴대폰 렌즈를 닮았기 때문일까. 요즘 세상은 텔레비전 광고 카피처럼 가운데 토막들이 잘려나간 흉측스런 형상들로 가득하다는 느낌이 든다. 머리와 꼬리는 있는데 그것을 이어주는 허리가 잘려나간 모습들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거리 곳곳엔 ‘머리의 구호’와 ‘꼬리의 설침’만이 난무하고 있다. 독사의 머리와 악어의 꼬리가 서로 물어뜯고 뒤채며 벌이는 살벌한 진흙탕싸움을 보고 있노라면 요괴들의 세계로 잘못 여행을 온 게 아닌가 싶어 겁이 더럭 난다. 말꼬리 잡는 싸움만 하니 설화(舌禍)를 입어 체면이 봉두난발(蓬頭亂髮) 형상이 되는 것도 일쑤요, 이쯤 되면 숫제 막말만 오간다. 모두가 머리와 꼬리를 이어줄 허리인 가운데 토막이 없어 화해와 조화를 유지할 균형 감각을 상실한 탓이다.

 여기에 대비되는 것이 거두절미(去頭截尾)라는 말이다. 서론과 결론은 이미 알고 있으니 요점만 말하라는 뜻이다. 상당히 공격적인 어투지만 그래도 요즘 같이 바쁜 세상에서는 나름대로 미덕을 갖춘 행동 강령이다. 사실 본론은 빠지고 서론과 결론만 있는 그런 담론이 얼마나 피곤하고 공허한가. 하지만 말만 번지르르하게 ‘본론’을 내세웠지 실상 현실 속의 우리는 ‘형식’을 차리는 데 익숙해 있다. 본론보다는 ‘시작과 끝’의 사개맞춤만 잘 되어 있으면 만사형통으로 치는 악습에 젖어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소위 수미쌍관식(首尾雙關式) 행정이 판을 쳤던 것도 사실이다. 정부 프로젝트도 겉 마무리만 그럴 듯하면 추진 과정에서의 모든 문제점이 덮어졌던 황당한 시절도 있었다. 본론에 충실하지 못한 까닭에 사업의 방향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 실패해 정부 사업이 용두사미가 되는 사례가 많았다. 관리 감독의 소홀로 사업의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아 부정이 판을 쳤다. 검은 커넥션으로 거액의 혈세가 눈먼 돈이 되어 탐욕스런 입으로 들어가 정책의 신뢰감에 먹칠을 하던 일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음험한 풍경은 삭제되어야 한다.

 벌써 갑신년 한 해가 다 저물어간다. 정부가 의욕을 가지고 추진하는 개혁입법들이 정치적인 문제에 부딪혀 연내 통과가 불투명하다. 의욕적으로 추진하고자한 IT뉴딜도 여야의 정쟁에 휘말려 엉거주춤한 상태다. 모든 일은 때를 맞춰야 하는 법이다. 때를 놓치면 피해는 부메랑이 되어 국민에게로 되돌아온다. 엊그제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예산안을 통과시키기로 합의를 본 모양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새해에는 지엽적인 논쟁보다는 ‘경제라는 본론’에 정책 최우선을 둔 정치권의 통 큰 화합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서용범 논설위원 ybs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