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호주에서 열린 한 IT 콘퍼런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예순을 훨씬 넘긴 할머니가 40대 IT 전문가가 전세계 IT 아웃소싱 시장 전망과 기업체가 준비해야 할 사항에 대해 던진 날카로운 질문에 여유있게 대답하고 있었다. 자신의 노트북PC에 담긴 수천 개 파일 중에서 질문자가 궁금해 하는 내용을 척척 찾아내어 조리 있게 답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현장에서 오랜 경험을 해야만 알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인 사례뿐만 아니라 최근 이론에 대해서도 막힘이 없었다. 손자 손녀들에 둘러싸여 집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소일로 동네를 둘러보러 나갈 법한 나이에 말이다.
5000여명이 참석한 나흘간의 콘퍼런스에서는 130여개나 되는 전문 세션이 열렸다. 관심이 있어 참석한 세션마다 3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전문가들이 IT시장의 미래에 대해 활발한 토론을 벌이는 모습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IT전문가와 각 산업의 전문가들이 한데 모여 IT산업의 미래를 열어가는 역동적인 현장이었다.
콘퍼런스가 더욱 빛나 보였던 것은 바로 앞에서 소개한 할머니와 같은 ‘리서치 펠로’ 때문이었다. 리서치 펠로란, 하나의 업종 또는 기술 분야에 수십 년 이상 종사하며 전문적으로 분석·연구함으로써 해박한 지식을 갖고 미래의 방향을 예측하며 더 나아가 업계를 선도하는 전문가를 일컫는 말이다.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변화가 빠른 산업일수록 이 같은 혜안을 가진 리서치 펠로의 역할이 더욱 요구된다.
IT산업은 변화무쌍하다. 변화하지 않는 산업은 없겠지만 IT처럼 급격하고 경쟁구도가 자주 바뀌는 산업도 많지 않을 것이다. 저변 기술이 빠르게 변할 뿐 아니라 주변 산업과 융합해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IT산업이 2007년까지 서비스 기반의 새로운 IT 혁명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핵심 인프라의 가격은 점점 낮아지고 유틸리티 개념이 도입돼 인프라를 이용한 만큼 돈을 내는 형태가 될 것이며, 네트워크도 무선화가 더욱 진전되고 안정될 것이다. IT기기는 항상 네트워크에 연결돼 저전력 지능화하고, 애플리케이션 개발은 비용도 줄어들고 개발시간 또한 단축될 것이라고 한다.
물론 예측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를 주도하든가 아니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향후 어떤 기술이 등장하고 사라질지, 주목받는 기술들은 언제 상용화되고, IT산업 종사자들은 어떤 기술들을 연마해야 하는지 등 많은 질문과 이에 대한 자기 나름의 해답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의 시대에 리서치 펠로와 같은 전문가의 선도적 역할이 필요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나라 SW산업에서는 전문가로 남기가 어렵다는 말을 많이 한다. 전문가로 10여년 일하다 보면 좋든 싫든 관리자가 돼야 한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한 분야에 20∼30년 이상을 몸 담고 펠로란 칭호를 받으며 전문 분야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갖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우리가 세계 IT산업의 흐름을 따라잡거나, 선도하는 위치에 서기 위해서는 리서치 펠로와 같은 전문가가 지속적으로 많이 배출돼야 한다. 앞으로는 국제 무대에서 한국의 IT전문가가 세계적인 리서치 펠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IT산업의 미래를 조망하는 일이 많아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뿐 아니라 각 개인도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자기의 전문분야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려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한국의 IT전문가 펠로들이 세계 IT시장을 주도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김인 삼성SDS사장 inkim@sams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