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 업계에 종사하다 보니 새로 출시된 서비스나 향후 출시 예정인 상품에 관한 각종 소비자 조사 결과나 시장분석 보고서를 많이 접한다. 대부분의 보고서 내용을 보면 소비자는 신규 서비스나 출시 예정 서비스를 사용하는 데 따른 혜택보다 이용요금, 단말기 구입비용 등과 같은 통신비 지출을 가장 우려하고 있으며, 실제로 통신비용과 관련된 부분이 신규 서비스 확산을 저해하는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1979년 카너먼과 트버스키가 인간의 소비의사 결정과 관련된 획기적인 이론인 가망이론 혹은 준거이론(Prospect Theory)을 발표했다. 이 두 학자는 위험이 수반되는 일련의 의사 결정을 할 때 인간은 전통적인 기대효용이론의 모델과는 달리 손익 비중과 확률을 다르게 잡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인간 본성에 근거한 가망이론을 통해 특정 사안에 대한 의사 결정시 기대 손익의 크기가 같더라도 소비자는 이익보다 손실을 더 크게 지각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보통신 상품의 소비현장에서도 가망이론의 내용이 그대로 적용되는데, 소비자가 신상품 사용에 따른 편리함, 시간절약 등의 혜택보다 사업자 전환, 통신비 지출 등과 같은 손실을 더 크게 인지하는 현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
이러한 현상에서 전혀 새롭지는 않지만 그동안 간과해 왔던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가망이론이 발표된 70년대 사람들이 느꼈던 소비의 가치 기준이 2000년대 동시대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결국 인간의 본성은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또한 변질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정보통신 관련 이슈는 지극히 기술적 또는 사업자 관점에서 논의돼 왔다. 기술 진보는 소비자의 수요환기를 유발할 것이고, 사업자의 마케팅은 시장을 창출할 것으로 믿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결국 인간의 본성을 간과하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2004년 처음으로 시작된 번호이동성제도의 경우 사업자의 공격적인 마케팅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번호이동을 한 고객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는 소비자가 한 번 소유한 것을 중시하고 그것을 바꾸기 싫어하는 본성에 기인한 귀속 효과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무선랜이나 인터넷전화, 영상통화 같은 서비스는 아직까지 시장의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 또한 기술 진보에 수반되는 학습과 시간에 저항하는 소비자의 본능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정보통신 업계에서 현재까지 가장 성공한 비즈니스 모델이나 상품 유형을 꼽아보면 e메일 서비스, 각종 채팅 사이트, 몇 년 전 대히트한 아이러브스쿨, 최근의 블로그에 이르기까지 모두 ‘커뮤니케이션’을 그 기저에 두고 있다. 즉 타인과 교감을 유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면을 자극한 콘텐츠가 주류를 이루며, 사용매체는 디지털이지만 그 본질은 지극히 아날로그 본성을 자극한 상품들이다.
2005년 정보통신 업계는 새로운 서비스들이 가져올 시장의 역동적 변화에 대한 기대가 높다. 이동전화와 초고속 인터넷 이후 뚜렷한 성장동력이 없는 상황에서 사업자들은 신규 수익원 발굴 차원에서 그리고 정부 관계자는 IT강국의 면모를 이어가야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정체된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성장동력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소비자는 그들만큼 절박하지 않다.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편리함과 즐거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절박한 심정만큼이나 시장을 바라보는 사업자의 패러다임이 변해야 한다. 소비자 자신도 모르고 있는 새로운 본성을 발견하고 사업에 활용하기 위해 이제는 소비자의 관점에서, 소비자의 눈높이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
시장분석과 관련된 그 수많은 보고서의 대부분은 이동성, 커버리지, 속도 등 지극히 기술적인 사업자 논리로 소비자를 평가하고 시장을 해부해 왔다. 이제는 ‘이 상품이 과연 소비자의 원초적 즐거움을 자극할 수 있을까?’ ‘이 콘텐츠가 정말 휴식 같은 편안함을 줄까?’ ‘소비자는 자투리 시간에 과연 무엇을 할까?’ 등과 같은 소비자 본성에 대한 해답을 구해야만 한다. 그 본질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다면 새로운 서비스에 대한 기대는 공허한 환상으로만 남을지 모른다.
<황민우 KT 마케팅연구소 마케팅전략연구팀 선임연구원 mwhwang@k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