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통신산업의 발전 역사는 외국 선진 기술의 적극적인 도입으로 이루어졌다. 전자교환기의 도입으로 시작된 전화 혁명은 CDMA 도입으로 이동전화를 열었고, 1990년대 후반의 세계적인 고속통신망 확산 경쟁에서 xDSL 도입으로 세계에서 제일 앞서 가는 초고속망을 구축하게 됐다. 이제는 IT839 전략으로 u코리아 비전을 수립하고 최근 광대역통합망(BcN) 시연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앞서 유비쿼터스 통신망을 구축하고 있다.
독일에서도 도입을 망설였던 전자교환기가, 미국에서도 장점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기존 망을 고려해 설치를 주저했던 CDMA가, 프랑스는 자기네 기술이면서도 미니텔을 버리기 아까워 채택하지 못했던 xDSL이 유독 한국에서만 성공적으로 활용되는 기술이 됐다.
한국은 세계 정보통신 역사에서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런 문화가 인류 복지 발전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앨빈 토플러도, 폴 케네디도 예측하지 못했던 21세기 정보통신 문화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21세기 지식정보 시대에는 우리도 정보 선진국이 된다는 커다란 비전을 제시했다. 당시 정보통신 장관이던 필자는 대통령의 장기적인 비전 달성을 위해 추진 도중에라도 단기적인 조그만 성공이 필요하다고 생각, 이미 과잉투자였던 광통신망을 활용해 xDSL기술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IMF로 위기에 처해 있던 우리나라로서는 또 하나의 과잉 투자라는 큰 위험이 따른 결정이었다. 그 후 후임 장관은 활용되지 않는 과잉 시설을 피하기 위해 인터넷 교육과 전자 상거래를 통해 초고속망이 실물 경제성장에 기여하도록 사이버코리아를 추진했으나 실질적인 성과는 아직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2000년에 불던 벤처 붐에서도,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월드컵에서도 선진 광대역 망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진정으로 인류 복지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기여했는지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이제라도 복지를 구체적으로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활용하려는 연구노력을 해야 한다.
정보통신부의 IT839 전략은 분명 수출을 늘리고 경제를 윤택하게 하려는 노력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민(수요 여건)의 이해와 절대적인 지지가 있어야 한다. 아직 일상생활에 바쁜 대다수의 국민에게는 IT839나 유비쿼티(ubiquity)는 또 하나의 알아듣기 힘든 전문 용어일 뿐이다.
우리나라에는 통신업자에게 전파 대역을 나누어 주고 막대한 출연금을 받아 기술 투자를 이끄는 정통부가 있고, 첨단 기술개발을 담당하는 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있으며, 정보통신 정책 방향을 연구하는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도 있고, 이 분야의 인재를 양성하는 정보통신대학교(ICU)가 있다. 막대한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는 기관은 국민 생활을 정신적·물질적으로나 윤택하게 하는 첨단 정보통신기술의 활용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세계에서 앞서 가기 때문에 벤치마킹할 상대 국가가 없다.
당장 2005년 밝지 않은 경제성장 전망을 접하면서 ‘정보통신 강국’에서 국민이나 기업이 어떻게 대응해야 IT 기반에서 제조업이 세계 경쟁력을 갖추고 유통업의 생산성을 대폭 개선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다. 날씨가 추운 세모에 불우한 이웃돕기는 IT 기반에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가를 알고 싶다. 모두가 선진국민답게 살고 싶어하는 열망에서다.
저성장 시대에 진정한 정보통신 강국으로 발전하기 위해 우리는 당장의 매출을 늘리는 것보다 차분히 우리 위치를 반성하고 미래 발전 방향을 재설정해야 한다.
◆배순훈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초빙교수 soonhoonbae@kgsm.ka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