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NEC가 우주개발사업단(현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 등과 공동으로 5년간 500억엔을 들여 개발한 ‘얼스 시뮬레이터’를 가지고 한때 천하제일 미국을 제치고 최고속 슈퍼컴 보유국이라는 영예를 안은 바 있다. 하지만 일본이 잠시 방심한 사이 세계 최고속 슈퍼컴 자리를 작년에 다시 미국에 빼앗기고 말았다.
일본의 자존심을 한껏 드높여준 ‘얼스 시뮬레이터’는 일본의 기후 연구에 막대한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토 테츠야 얼스시뮬레이터 단장은 “탄소나노튜브, 단백질 해석, 지구 온난화 매커니즘 해명 등 여러 중요한 과학 실험에 슈퍼컴퓨터는 필수적”이라면서 “얼스 시물레이터 때문에 일본이 기후 연구에서 미국 과학자들보다 10∼100배 정도 앞섰다”고 밝혔다.
도쿄 남부 교외 지역에 설치된 ‘얼스 시뮬레이터’는 해양 온도·강우·지각 변동 같은 자연 현상을 추적, 자연 재해를 막는데 매우 긴요하게 사용되고 있다. 일본 대표적 슈퍼컴퓨터업체인 NEC는 ‘얼스 시뮬레이터’ 이외에도 ‘SX-8’이라는 초고속 슈퍼컴퓨터를 작년 10월말 개발하는 등 일본내 확실한 슈퍼컴퓨터 명가로 자리잡고 있다.
작년 11월 기준 ‘슈퍼컴500’ 리스트에 오른 일본 슈퍼컴은 모두 30대다. 이는 세계 5위 수준으로 일본이 세계 2위 경제국가임을 감안하면 초라한 실적이다.
사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수요 층이 없는 상태에서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슈퍼컴 개발에 힘을 기울일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이같은 일본 정부의 소극적 입장은 올들어 180도 바뀌면서 미국을 강도 높게 압박하고 있다. 일본 정부 자문기관인 과학기술학술심의회는 올 1월 일본이 향후 10년간 진행할 ‘제 3기 과학기술기본계획(2006∼2010년)’을 확정했는데, 여기에는 세계 최고의 슈퍼컴퓨터 개발이 당당히 들어가 있다.
이 계획에 따라 일본은 오는 2010년경 페타 플롭스(초당 1000조회 연산 처리)급 슈퍼컴퓨터를 선보이며 세계 최고속 슈퍼컴 자리를 다시 차지할 계획이었다. 페타 플롭스 슈퍼컴은 펜티엄 133MHz 프로세서보다 1억배 가량 빠른 컴퓨터다.
하지만 일본은 여기서 만족 하지 않고 최근 다시 한번 깜짝 세상을 깜짝 놀랄만한 슈퍼컴퓨터 개발 계획을 공표했다. NEC, 히타치 등 주요 IT 업체와 도쿄대, 규슈대 등 대학이 힘을 합해 무려 1경 플롭스, 초당 1조의 1만배에 달하는 부동소수점 연산능력을 가진 슈퍼 컴퓨터를 오는 2011년부터 가동하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발표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내년부터 기본 설계작업이 시작되는데 1000억엔(9279억원)의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 전광석화 같은 차세대 슈퍼컴퓨터는 질환을 유발하는 단백질의 복잡한 구조를 분석, 이를 억제하는 신약연구를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또 심장병 수술때 의료진이 시뮬레이션을 통해 안전 여부를 먼저 점검할 수 있게 하는 등 의료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일본 의학계는 내심 기대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일본은 국력에 걸맞는 슈퍼컴퓨터를 갖지 못했다”고 시인하면서 “하지만 다가오는 10년은 일본이 세계정상 슈퍼컴퓨터 국가임을 확인시켜 줄 것”이라고 역설했다.
방은주기자@전자신문, ejb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