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 피오리나 전 HP 회장은 지난 99년 10월 회장 내정자 자격으로 방한했었다. IMF 파고를 힘겹게 넘고 있던 한국의 대통령은 피오리나에게 “HP가 한국 정보통신 산업 발전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외자가 절실했던 우리 정부에 고려증권빌딩(현 한국HP 본사) 매입을 포함한 달러 투자를 약속하고 그렇게 했다.
피오리나는 이후 해마다 우리나라에 찾아와 선물꾸러미를 풀어 놓곤 했다. 지난해에도 우리 정부가 글로벌기업의 연구개발(R&D)센터 유치에 총력을 기울이자, 우리나라에 모바일 솔루션 센터인 ‘코리아디벨러프먼트센터(KDC)’ 설립을 확정했다. KDC는 현재 아시아 지역 모바일 솔루션 개발 거점으로 활용중이다.
그는 방한 때마다 이건희 삼성 회장,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 등 국내 핵심 IT 인사들과 연쇄 회동을 갖고, HP의 협력을 약속했다. 그 결과 한국HP는 국내 최대 외국계 IT업체로 발돋움했다. 한국IBM이 장악하고 있는 서버 시장은 물론이고 국내 대기업들이 즐비한 시스템통합(SI) 시장에서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피오리나는 지난 2월 주주들과의 갈등으로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뒤를 이어 NCR 최고경영자(CEO)인 마크 허드가 HP의 새로운 회장으로 3월 말 취임했다. 그는 인수인계가 끝나자마자 주요 국가를 방문중이다. 최근에는 중국과 일본을 방문했다. 하지만 한국은 그대로 지나쳤다. 한국에 대한 그의 생각은 피오리나와 다를 수 있다. 과거와 달리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는 한국 컴퓨팅 시장 환경은 전략상 중국과 일본에 비해 덜 중요할 수도 있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실제로 연내 그의 방한은 어려울 것이라는 한국HP의 설명도 있다.
하지만 허드 회장에게 한국은 소홀히 대할 수 있는 시장이 아니다. 한국은 세계 최대 모바일 선진국 중 하나며, 컴퓨팅 분야에서도 세계적인 테스트베드 시장이기 때문이다. 삼성은 HP의 최대 고객 중 하나다. 피오리나는 바로 이러한 점을 놓치지 않았다.
방한중인 헤닝 카거만 SAP 회장이나, 다음주 국내에 들어오는 댄 워먼호벤 네트워크어플라이언스 회장이 방한에 앞서 한목소리로 “한국은 전략 시장”이라고 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시장에 대한 허드 회장의 새로운 인식을 기대해 본다.
컴퓨터산업부·김익종기자@전자신문, ij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