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장인(匠人) 정신이 강하다. 교수 생활을 하던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우동 가게를 맡는 정도는 뉴스거리도 아니다. 일본 내에서 특히 교토 지역은 장인 정신이 매우 강하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술 브랜드 중 하나인 ‘月桂冠(겟카이칸)’은 교토에서 360년째 만들어지는 정종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겟카이칸이 지역적인 협력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겟카이칸의 재료인 쌀과 물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교토 인근에서 나는 가장 질 좋은 쌀과 가장 깨끗한 물로 빚는다. 물론 쌀을 재배하는 농부나 물을 공급하는 사람 역시 360년 동안 거의 변함이 없다고 한다.
이처럼 교토에는 예전부터 직물이나 도자기, 양조 등 전통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 클러스터가 형성돼 있었다. 상품에 혼을 싣는 장인정신과 지역 경제에 기반을 둔 클러스터가 결합해 이른바 교토식 산업 클러스터로 발전했다.
교토식 산업 클러스터는 기업간 협력, 우수한 대학, 지방정부의 지원이라는 3박자가 맞아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경쟁보다는 상생이 경쟁력 = 전통적 교토식 산업 클러스터는 오늘날의 ‘교토식 경영’으로 이어졌다. 교토에 자리를 잡은 하이테크 기업은 다른 하이테크 기업을 지원한다. 선발 기업이 제품 발주나 자금 대여 등을 통해 후발 기업을 키우는 형태다.
실제로 이러한 사례는 매우 많다. 무라타제작소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칩 부품 업체다. 이 회사의 오늘을 있게 만든 요인 중 하나는 선발 기업인 시마즈제작소의 공이다.
시미즈제작소는 후발주자인 무라타제작소에 제품을 발주했고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무라타제작소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 시미즈제작소에 최고 품질의 제품을 공급했고 이는 세계 제일의 기술 경쟁력으로 발전했다.
또 다른 굴지의 부품 업체인 옴론은 1973년 창업한 일본전산이 유동성 위기를 맞이하자 대규모 자금을 지원, 연구개발을 지속하도록 지원했다. 제어기기와 시스템기기를 주력으로 하는 옴론은 정밀모터를 개발하는 일본전산을 함께 공생해야 할 동반자로 여긴 것이다. 그 결과 일본전산은 하드디스크 모터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올라선 것을 비롯해 중소형 모터와 전원 장치 분야에서 세계적인 입지를 구축했다.
◇양질의 인력과 첨단 기술을 공급하는 대학 = 교토식 클러스터는 기업 간 협력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클러스터에서 대학은 기술혁신과 인력공급 면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다.
교토 지역의 대학은 36개에 달한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교토대는 일본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만들어냈다.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전체 일본인 수상자 7명 중 6명이 교토대 출신으로 ‘관료를 배출하는 도쿄대, 연구자를 배출하는 교토대’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특히 교토 지역 대학에 소속돼 있는 벤처기업 수는 44개로 오사카 지역의 12개나 나고야 지역의 7개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대학이 워낙 많이 몰려 있는 도쿄 지역을 제외하고는 교토 지역 대학이 벤처기업의 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토 지역 대학들은 지난 95년 ‘교토벤처비즈니스연구소’를 설립, 지역 벤처에 특허와 창업 관련 상담을 제공하고 있다.
대학의 경쟁력의 높이기 위한 교토 지역 기업의 지원도 주목할만하다. 삼성경제연구소 양준호 수석연구원은 “무라타제작소나 호리바제작소, 교세라 등 교토 지역 굴지의 기업들은 대학이 필요로 하는 첨단 연구 장비를 지원, 대학의 성장에 따른 기술 개발과 양질의 인력 공급이라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지방정부의 지원 = 기업과 대학뿐 아니라 교토시도 클러스터의 중요한 축을 지탱하고 있다. 교토시는 ‘교토시벤처감정위원회’와 ‘교토기업가학교’를 설립, 클러스터 발전을 지원하고 있다.
교토시벤처감정위원회는 교토 클러스터의 핵심 기관이다. 호리바제작소나 교세라, 일본전산 등의 CEO가 창업 희망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을 평가, 효과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이 과정을 거쳐 교토시벤처감정위원회가 선발한 벤처기업에는 교토시가 자금을 지원한다.
세계적인 기업의 CEO가 손수 제공하는 컨설팅 비용은 얼마일까? 놀랍게도 이 컨설팅은 무료로 제공된다. 호리바제작소의 호리바 회장은 지원이 결정된 벤처기업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정과 같다’고 표현할 정도다. 바로 교토식 산업 클러스터의 숨은 경쟁력이다.
교토시의 민간 조직인 ‘칸사이TLO(Technology Licensing Organization)’는 교토 지역 대학생들이 개발한 기술을 사업화할 수 있도록 기술이전 업무를 담당한다. 이 기관은 교토 지역의 벤처기업이 대학의 기술을 사업으로 만들 경우 기술 평가는 물론 마케팅까지 지원한다.
이경우기자@전자신문, kwlee@
장동준기자@전자신문, djjang@
김규태기자@전자신문, star@
◆교토식 경영을 만든 교토의 지역 특성
교토는 일본에서도 가장 개성이 강한 지역이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은 ‘교토식 경영’의 중요한 배경이다.
지금은 도쿄가 일본의 수도지만 교토는 도쿄보다 더 많은 시간 동안 일본의 수도였다. 따라서 교토 사람들은 ‘행정 수도는 도쿄지만 문화와 전통의 중심은 여전히 교토’라는 의식이 강하다.
삼성경제연구소 구본관 수석연구원은 “교토 사람들은 지역적 자존심이 강해 도쿄를 ‘문명적 촌놈들의 집합’이라고 하면서 낮게 평가할 정도”라며 “일본에서는 이를 ‘교토중화사상’이라고 표현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반골 기질은 독창적 경영 방식과 탈 계열화로 이어졌다. 교토는 예로부터 독특한 장인이나 기업가가 많았다. 과거 수백 년을 이어오는 전통 산업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혼을 실은 상품’이 현대로 넘어와서는 첨단 기술을 파헤치는 근성으로 발전한 것이다.
또 다른 교토의 독특한 지역 정서는 방임형 대인관계다. 전국시대에서 메이지유신 이전까지의 혼란기에서 교토는 권력 투쟁의 최전선이었다. 여기서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 독특한 처세문화와 이중적 인간관계가 만들어졌다.
이는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입장을 가진 사람이나 심지어 외지인에게도 자신의 규범을 강요하지 않는 개방적 태도로 이어져 개성이 강한 인재가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을 발휘할 수 있는 풍토가 형성됐다. 이것이 도쿄의 집단주의와 다른 교토식 경영의 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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