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해를 보낼 때나 지난 일에 관한 한 우리는 대체로 ‘잊자’주의자들이다. 하지만 기념일에 대해서는 이와 달리 ‘챙기자’주의다. 가족의 수가 적고 범위가 좁아진 요즘 아이들의 생일을 챙겨주지 않으면 그야말로 나쁜 부모가 된다. 아내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기억 못한 남편들은 신판 칠거지악에 해당되는 세상이다. 가정이 이럴진대 국가나 단체, 기업은 그 기념일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기념일을 챙기는 것이 오히려 그동안의 일을 정리하고 평가할 수 있어 의미 깊다. 그저 ‘잊자’가 아니라 기억할 일과 버릴 일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산업이나 기술과 관련된 기념일은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일이 일어났으며, 그 일이 현재의 우리 삶에 또는 국가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생각하다 보면 우리의 시야는 저절로 넓어진다.
지난 1일은 우리가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휴대전화 기술을 상용화한 지 10주년 되는 날이었다. 산업적인 기념일은 5년이나 10년 단위 등 ‘꺾어지는 해’를 중시한다. 다른 기념일과 구별되게 변화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만큼 언론매체가 10주년을 놓칠 리 없다. 하지만 이번만은 새해 첫날이어서 그런지 CDMA 상용화 10주년 관련 기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물론 처음 가입자를 받은 날을 따져 3일을 기점으로 10주년 관련기사가 쏟아져 나왔지만 자칫 묻혀버릴 뻔했다.
CDMA란 어떤 것인가. 미국의 벤처기업이 개발했으며,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기술이다. 우리가 처음 도입할 때만 해도 선진국에서 채택하던 아날로그 기술과는 전혀 달라 상용화 가능성까지 의심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떤가. CDMA 도입으로 짧은 기간에 통신산업 후진국에서 일약 세계적인 이동통신 강국으로 올라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가 기술변화 과정에서 과감히 미래지향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얻은 결과다.
CDMA 역사를 평가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CDMA 상용화 10주년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은 ‘도전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과거 산업역사를 보면 이런 교훈을 주는 게 한둘이 아니다. 영국이 목선 대신 철선을 도입해 조선산업을 제패한 것도 그중 하나다. 이처럼 기술변화의 선두에 서서 이를 잘 이용한 기업이 있는가 하면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고서도 대응하지 못해 사라지는 기업도 많았다. 기술의 패러다임이 변하는 과정에 적응하는 자는 생존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도태하면서 업계가 완전히 재편되는 경우를 우리는 그동안 수없이 보아왔다. 영국이 조선기술의 변화를 읽지 못해 일본에 선두자리를 내준 것도 그 예다.
IT라고 다를 게 없다. 오히려 다른 산업에 비해 변화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기 때문에 한 번 경쟁에서 밀려나면 회복하기 어렵다. ‘우리가 굳이 이런 서비스를 처음 실시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IT업계 흐름을 모르는 사람 취급받기 십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요즘 지상파DMB와 와이브로가 ‘신성장 동력’으로서 우리 경제를 살릴 ‘제2의 CDMA’로 인식되고 있다. 우리 고유의 기술인 데다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고 세계 각국에서 상용화에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휴대폰을 능가하는 IT신화를 창조할 것이란 기대와 희망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기술을 선도하는 단계인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세다. 수많은 기술변화 중 무엇을 어떻게 미래의 주력기술로 만들지를 판단하고 마케팅해야 한다. 우리만의 기술이 아니라 세계화를 이뤄내야 한다. 그래야 희망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윤원창 수석논설위원 wcyoo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