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콘텐츠포럼]인문학과 문화콘텐츠](https://img.etnews.com/photonews/0602/060210113208b.jpg)
문화콘텐츠학은 인문학(스토리)·예술(디자인)·공학(IT)·사회과학(문화마케팅) 등 학제간 ‘결혼’으로 탄생한 신학문이다. 특히, ‘문화콘텐츠학과협의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대학의 학과는 모두 인문학 전공교수들이 주도하여 학과와 연계전공을 개설했다. 콘텐츠의 핵심이 스토리에 있고 ‘스토리텔링’의 능력은 인문학이 우위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이 산업과 만났을 때 인문학은 왜소했다. 인문학자에게 ‘사업제안서’는 낯설기만 했다. 경영학과 공학적 마인드가 있어야 제안서가 가능했고 제안서 자체도 매력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콘텐츠를 이루는 핵심이 인문학적 상상력에 근거한 스토리라고 하면서도 아직 인문학은 자신이 없었다.
이제껏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나온 다양한 처방 중 가장 성공적(?)인 것을 꼽는다면 2002년부터 시작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육성사업(인문사회분야)일 것이다. 월 50만원 내외의 시간강사 수입으로 살아가야 할 박사 연구자들에게 월 200만 원 이상의 연구비는 대단한 위력이었다. ‘지식인의 반란’ 가능성을 예견한 사람들이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의 ‘인문학’ 학과 자체가 변하지는 않았다. 학생감소의 위기를 덜 느끼는 수도권 대학일수록 변화를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4년제 대학의 인문학 교수들이 문화콘텐츠산업과 보다 연계가 가능한 학과를 만들고 관련 강좌를 개설하도록 이끈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창조적인 연구를 위한 지원이 아니었다. 창조가 아니라 재구성일 뿐인‘문화콘텐츠플래너’ 양성이 바로 인문학도가 개척해야 하는 ‘블루오션’이라고 본 것이다.
2002년부터 시작된 문화콘텐츠진흥원의 문화원형사업이 인문학자들의 생각을 바꿔놨다. ‘창의력과 경쟁력의 보고(寶庫)인 문화원형을 테마별로 디지털콘텐츠화해 문화콘텐츠산업에 필요한 창작소재를 제공함으로써 문화콘텐츠산업의 경쟁력 향상을 도모시킨다’는 사업 목표가 실현가능한 실체로 다가왔다.
문화원형사업 설명회가 열릴 때마다 전국의 인문학, 특히 한국문학과 한국사 연구자들이 대거 참석한다. 내가 참석한 네 차례 모두 준비된 의자가 부족하여 선 채로 설명을 듣기 일쑤였다. 경쟁률도 날로 높아지고 있다. 과제당 평균 7, 8팀이 제안서를 제출한다. 어문학·사학·철학 등 인문학과의 정원을 조정해 문화콘텐츠 관련학과를 신설하거나 아예 전통 인문학의 정체성을 포기하면서까지 학과 이름을 바꾸는 대학들도 많다.
문화(원천소스)를 가공해 산업화(콘텐츠화)하는 문화콘텐츠가 인문학자들에게 새롭게 인식된 것이다. 물론 문화콘텐츠는 어느 특정 영역의 산물이 아니다. 원천소스를 가공해 디자인하고 적합한 기술을 적용해 제작한 산출물이다. 그러므로 ‘문화콘텐츠학’은 원천소스를 구성·소통·가공·전달하는 ‘관계’를 중시하는 학문이다.
‘문화콘텐츠학과협의회’ 교수들 중에는 이미 문화원형사업에 주관기관이나 참여기관, 혹은 자문위원으로 한두 차례 참여한 사람이 많았다. 지난해부터 문화원형사업이 글로벌문화로 확대돼 ‘앙코르와트’와 ‘세계의 와인문화’ 과제가 진행중이다. 이로 인해 외국학 전공자들의 참여가 가능해짐에 따라 문화원형사업에 대한 기대가 더 커지고 있다. 문화원형사업은 인문학자들에게 자신의 학문이 소수의 전공자를 넘어 일반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모델적인 통로를 제공함으로써 문화콘텐츠학을 새로운 응용인문학으로 자리매김시키고 있다.
최근 문화원형사업의 효용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문화콘텐츠산업의 리소스(중간재)로 만들어진 콘텐츠 판매가 부진하다는 것이 이유다. 그러나 이는 단견이다. 문화원형사업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가 없는 정부사업으로 과거 어떤 정책보다도 ‘인문학의 전향적인 발전’에 영향을 주고 있다. 현재진행형이다. 나아가 5000년 우리 역사의 대사건인 한류(韓流)가 아시아, 세계와 합류(合流)되어 발전하기 위해서는 문화원형사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한국문화뿐만 아니라 글로벌문화 전문가들이 후학들을 양성하면서 우리 문화콘텐츠산업을 세계인이 공유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려놓아야 할 것이다. CT산업을 견인하는 리소스와 인력이 문화원형사업에서 나올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임영상 전국문화콘텐츠학과협의회장 ysun22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