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사냥꾼 칼 아이칸으로 인해 재계가 난리법석이다. 아이칸은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날카로운 상어 이빨로 정서적으로는 공기업이나 다름없는 KT&G를 덥석 물어버렸다. 아이칸은 부분적인 경영참여를 요구하더니 공개매수에 나서 아예 통째로 집어삼킬 요량이다. 재계는 말 그대로 카오스 상태에 빠졌다. KT&G 사태는 투명하고 건실한 기업에는 상어가 덤비지 않는다는 통념을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웬만한 굴지의 업체들은 외국인 지분이 절반을 넘어선 지 오래인만큼 어느 누구도 적대적 M&A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지고 있다.
이 같은 사태의 가장 큰 원인은 상어가 도대체 무언지도 모른 채 ‘위험하다’ ‘아니다’로 허송세월한 탓이다. 금융자본에 관한 한 외국이 헤비급이라면 우리나라는 아직 플라이급 수준이라는 데 의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플라이급이 헤비급 선수와 동일한 룰로 사각의 링에서 맞붙기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특히 허점만을 노려 변칙공격을 일삼는 기업사냥꾼에게는 한입 거리밖에 안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국제 자본시장의 공정한 룰만 충실히 따르려 했다. 자본의 규모나 질과 같은 체급을 애써 무시했다. 재계의 우려와 불만을 국제 룰을 따르지 않으려는 변명으로만 치부했다. 불만을 제기하기보다는 한시바삐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지배구조를 개선해 상어가 덤빌 수 없도록 하라는 게 정부와 시민단체의 요구였다.
그렇다고 재계가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부와 지배구조 개선 문제를 놓고 다투기에만 열중했지 개선에는 미온적이었다. 손쉬운 정관 개정이라도 해두는 준비조차 소홀히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많은 기업이 외국자본에 의해 지분의 절반 이상을 점령당한 후였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했던가. KT&G에는 미안하지만 정부와 재계는 비로소 열린 자본시장에서 일어나는 냉엄한 게임의 법칙을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됐다. 소위 메기론처럼 상어의 무서움을 깨달은 이상 정부도, 재계도 더는 말로만 왈가왈부하며 앉아서 당하고만은 있지 않으리라.
그런데 이상한 점은 재계의 지나칠 정도의 혼돈과 달리 벤처업계는 너무 조용하다. 이렇다 저렇다 말 한마디 없다. 물론 몇몇 업체는 조용히 정관을 고쳐 적대적 M&A에 대비하고는 있지만 그뿐이다. 벤처업계의 이상한 침묵은 왜일까. 아직 자신들에게 닥친 일도 아니고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수년 전 한글과컴퓨터·새롬기술·나모인터랙티브 등 대표 벤처들도 적대적 M&A를 경험한 적이 있다. 외국 자본이 아닌 국내 자본이라는 점만 빼고는 진행되는 형국이 지금과 다를 바 없었다. 벤처가 침묵하는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일본 소프트뱅크의 그라비티 인수는 장안의 화제가 됐다. 벤처인은 한결같이 김정률 회장을 부러워했으며, 손정의 사장에게 찬사를 보냈다. 벤처는 옥션이나 그라비티처럼 외국 자본으로부터 우호적 M&A를 수차례 경험했다. 그렇지만 외국 자본으로부터 적대적 M&A 공격을 받은 적은 아직 없다. 오히려 벤처들에는 외국 자본이 아니라 국내 자본이 상어로, 아니 독수리로 보일 수 있다. 그것도 이름만 남은 다 죽어가는 벤처들이 주 대상이다. 마치 독수리가 먹잇감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벤처인의 눈엔 외국 자본은 양반인 셈이다. 적대적 M&A에 대한 재계의 지나친 두려움, 우호적 M&A보다는 사체줍기를 기다리는 국내 자본을 향한 벤처계의 따가운 시선이 묘하게 교차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했던가. KT&G 사태가 M&A를 바라보는 재계와 벤처 간의 상반된 괴리를 조금이나마 좁혀주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유성호 논설위원@전자신문, shy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