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우리나라에 왔을 때 선배 교수가 매킨토시와 IBM PC 중 어떤 것이 좋으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매킨토시 시장 점유율이 10% 정도로 낮았지만 기능이 월등히 좋았기 때문에 매킨토시를 구매할 것을 권유했다. 우수한 기능의 컴퓨터가 미래를 제패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IBM PC 점유율은 높아졌고 매킨토시를 구매한 선배는 SW 호환성 때문에 무척 고생했다.
게임이론 중 네트워크 효과라는 게 있다. 사람들은 다수가 좋아하는 것을 구매한다는 것이다. 초창기 비디오 시장에서 소니의 베타방식과 내셔널의 VHS 방식 대결도 마찬가지다. 성능의 우월성보다는 시장 점유율이 높은 상품이 더 잘 팔린다는 것이다. 후삼국 시대에 왕건과 견훤이 대립하는 상황도 비슷하다. 세금을 조금 낼 수 있게 하겠다는 견훤보다는 많은 호족이 선호하는 왕건에게 사람이 더 몰렸기 때문에 왕건이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 선거에서도 대세론이라는 것이 네트워크 효과와 일맥상통하다.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 공학교육에 큰 변화가 있었다. 외환위기에 이어 이공계 기피 현상이 생기면서 공대 교수들은 위기의식과 함께 현재의 교육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뜻있는 몇몇 교수가 중심이 돼 1999년 한국 공학교육인증원(공인원)을 설립했다. 선진국 수준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라 우리 학생을 잘 가르치자는 취지였다.
지난해 9월에 발표된 전경련 자료에 따르면 대졸 신입사원 교육비용이 8조원이나 든다고 하는데 공학교육을 잘하는 것이 결국 국가 경쟁력으로 직결된다. 공인원이 처음 설립됐을 때에는 교수들의 참여가 저조했다. 학생을 제대로 교육하기 위해서는 교육환경 개선이 필요하고 특히 교수들의 엄청난 노력이 요구됐기 때문이었다.
많은 교수가 새로운 교육방식에 따른 교육이 옳은 길임을 알면서도 선뜻 참여하지 못했다. 설계 능력, 문제해결 능력, 의사소통 능력, 팀워크 기술 등을 가르쳐야 하는데 실험시설과 교재 개발 등에 필요한 재원이 부족해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특히 강의기법 향상을 위한 노력이 절실한데 연구만을 강조하는 학교 풍토에서 교수들은 수업에 신경 쓸 시간이 부족했다.
미국 과학기술재단(NSF)에서는 다양한 혁신공학 교육연구 프로그램에 지난 15년간 1500만달러를 지원해 왔다. 여러 학문을 복합적으로 접목하는 교과과정 연구, 대학 연합을 통한 학과 프로그램 개선, 공학도를 위한 심화과정 연구, 문제 해결력을 키울 수 있는 공학교육 등과 같은 혁신적인 공학 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함으로써 미국 공과대학은 한 발 앞선 교육을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 미 매사추세츠공과대학에서는 설계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설계교육용 실험실과 회의실을 학생들에게 24시간 지원하고 있다.
이는 공학교육에 관심을 가진 산업체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루어진 성과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부 및 산업 차원의 공학교육 연구 지원은 미국 대학들의 공학교육 연구센터 설립의 기폭제가 됐다. 미국 전역의 공학교육 연구센터는 지역·대학별로 연합 연구를 함으로써 학교별로 학습 성과를 비교하고, 더 효과적인 교수법을 고안하는 연구를 통해 공학교육 질을 높이는 사업을 진행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5년간 19개 공과대학이 공학인증을 받았다. 전체 공과대학이 150여개인 데 비해 매우 적은 수의 대학만이 국제 수준에 맞는 교육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30여개 공과대학에서 교육연구센터를 운영중이다. 대부분 최근 몇 년 사이에 설치돼 학교 지원은 열악하지만 학생을 잘 가르치겠다는 열의는 대단하다. 이제는 빛바랜 노트를 들고 수업준비도 안 한 채 강의실에 들어서는 교수는 설 땅이 없어진다. 최근 인증받은 학생에게 입사 시 가산점을 주겠다는 삼성전자 발표에 따라 인증에 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이제 공학교육에도 네트워크 효과가 증폭돼 우리나라 모든 공과대학이 국제 수준의 내실 있는 교육을 하는 날이 오리라 기대한다.
◆문일 한국공학교육연구센터 소장 ilmoon@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