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가, 환율 하락, 원자재가 상승 등 산업계를 압박하는 요인이 하나둘이 아니다. 하지만 요즘 산업계의 화두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인 듯하다.
정부는 한 달이 머다하고 상생협력 촉진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쏟아내고 있다. 부품 공동 연구개발(R&D)과제, 구매조건부 R&D과제를 개발하는가 하면 휴면특허 이전사업 등 지금까지 나온 지원수단만도 수십 종류에 이른다. 이것도 모자라 대·중소기업 상생 협력 촉진에 관한 법까지 만들어 내달 발효를 앞두고 있다. 경제정책의 최우선 순위가 상생 문제인 듯한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대기업도 중소기업과 상생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주요 기업들은 올해 들어서도 앞다퉈 중소기업 협력 및 지원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기업마다 어음결제 대신 납품대금을 현금으로 주고, 성과공유제 도입에다 경영 컨설팅도 해주겠다며 ‘선심공약’을 쏟아냈다. 나올 만한 아이디어는 다 나왔다. 지원내용도 작년과는 확연히 다르다. 중소기업의 혁신역량에 핵심 함수라 할 수 있는 기술, 인력, 자금, 판로 부문은 모두 들어 있다. ‘하도급업체’라는 용어도 ‘협력업체’로 바뀌었다. 누가 봐도 우리나라가 정말 ‘중소기업 천국’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다.
이렇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대·중소기업 상생 문제는 국가 CEO인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챙기고 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작년에만도 상생 관련 회의를 세 차례나 주재했다. 대기업 총수들이 참여한 회의가 두 번이다. 올해 들어서도 벌써 두 번 열었다. 지난 19일에는 중소기업인과 간담회를 가졌고, 어제는 대기업 총수들을 청와대로 불러 상생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대기업 임원들이 ‘상생 스트레스’가 생겼다고 호소할 정도니 청와대 회의가 얼마나 부담감을 주는지 짐작이 간다.
그럼에도 중소기업계는 반색하는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청와대, 정부, 대기업까지 나서서 자신들을 돕겠다고 팔을 걷어붙이는데도 왜 시큰둥할까.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상당수 대기업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쥐어짜기식 납품단가 인하, 판로 제한, 회사기밀 가로채기, 어음결제 관행 등의 문제점을 여전히 시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 총수들은 상생 협력을 약속하지만 현장 실무자는 실적 올리기를 강요받아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게 중소기업인들이 털어놓는 불만이다. 청와대가 아무리 나서봤자 현장에선 달라진 게 별로 없다는 얘기다. 금과옥조 같은 중소기업 지원정책이 연일 쏟아지지만 밑바닥은 요지부동인 것이다.
중소기업들이 청와대 회동에 맞춘 대기업의 상생협력 지원 표명을 ‘생색용’ ‘면피용’이라고 폄훼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문제는 이 때문에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불신의 벽’이 쌓인다는 점이다. 불신의 벽을 허무는 것은 실천뿐이다. 이는 대기업 최고경영자가 노 대통령처럼 상생 문제를 직접 챙기고, 그것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한국적 기업문화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대기업 최고경영자가 확고한 상생 철학을 갖고 있고 또 이를 새로운 기업문화로 정착시켜야만 현장에서도 통한다.
이렇게 되지 않는 한 현재 조성되고 있는 ‘상생’ 분위기는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겉으로는 ‘상생’을 말하면서 뒤로는 ‘상전’ 노릇을 하는 한 상생을 외치는 것이 공염불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상생은 정부가 인위적인 정책을 통해 그 틀을 만들려 하기보다는 시장감시자로서의 역할에 더 충실하고 우월적 지위에 있는 기업 CEO가 직접 나설 때 제대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청와대에서 열린 상생협력 회의도 의미 있다.
◆윤원창 수석논설위원 wcyoo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