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정책이 기술개발과 산업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칼럼을 통해 이미 기술개발과 관련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이동 통신망의 완전 개방 정책을 주장한 바가 있다. 이와 함께 무선 관련 기술과 콘텐츠 산업을 활성화하려면 전파관리 체계도 변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금까지는 어느 나라나 전파라는 국가자원을 관리하는 데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대체로 국가가 전파의 용도를 미리 결정하고 이용자에게 이용권을 허가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급속한 신기술의 출현과 전파자원의 희소성 때문에 선진국을 중심으로 전파자원의 시장화가 심도있게 논의되고 있다.
전파자원의 시장화는 말 그대로 전파의 용도가 정부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시장에 의해 정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비교우위가 있는 신기술과 서비스의 상용화가 기동성 있게 실현되고 낡은 기술과 서비스는 시장에 의해 신속하게 퇴출된다. 따라서 앞으로는 전파자원의 시장화 정책이 실현된 국가와 그렇지 않은 나라 간의 기술과 관련 산업 발전에는 엄청난 격차가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이미 2002년 6월에 ‘스펙트럼 정책전담반(Spectrum Policy Task Force)’을 구성해 면허시스템과 함께 재산권 시스템과 공유대역 설정이라는 정책적 선택사항을 조사하며 전파사용과 2차 시장에 대한 제약을 완화하고 경매를 통한 할당 방식을 고려함으로써 시장기구 방식이 새로운 전파관리 체계로 도입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또 2003년 5월 FCC는 ‘Promoting Use of Spectrum Through Elimination of Barriers to the Development of Secondary Market’이란 제목의 의무규정이라 할 수 있는 리포트 앤드 오더를 내놓았다. 이것은 전파보유 사업자에게 전파임대 권한을 부여하고 임대절차를 간소화하는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2004년 6월 FCC는 2003년 5월의 의무규정에 추가해 사적 공유(Private Commons)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즉 면허 소지자의 인프라에 개인이나 단체 이용자의 접근이 용이하도록 하여 메시 네트워크나 애드혹(Ad-Hoc) 네트워크와 같이 새로운 기술과 기기가 쉽게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지금 방송·통신 융합이 국가적인 이슈가 되고 있지만 이 문제는 부분적으로 전파관리 체계의 시장화와 맞물려 있다. 즉 현재의 지상파 방송은 전파의 이용이 방송이라는 기술적 수단에 의해 제한돼 방송 콘텐츠만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주파수의 시장거래가 허용되면 용도는 기술발전에 따라 시장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방송 채널(매체)에 제한 없는 콘텐츠(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매체와 관계 없이 기술적으로 가능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돼 이동통신이나 DMB도 서비스할 수 있게 된다. 기술적 표현으로 매체와 콘텐츠가 분리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9번 채널로 KBS만 수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처럼 모든 방송이나 정보를 선택적으로 볼 수 있다. 방송·통신 융합은 어떤 의미에서는 주파수의 시장화에 의해 자연적으로 달성될 수도 있다.
과거 네트워크의 독점에 익숙해 있던 통신사업자가 자기가 관리하지 못하는 정보가 자기 네트워크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인터넷이라는 개념을 선뜻 수용하기 어려웠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네트워크와 정보의 분리에 앞장서고 또 네트워크를 개방하고 있다. 앞으로는 방송사업자가 앞장서 자기 소유의 주파수 활용을 위해 망과 콘텐츠를 분리하고 개방할 때가 올 것이다. 이를 제도적으로 촉진할 수 있는 것이 주파수 시장화 정책이다.
우리는 과거 전화기 시장의 개방을 통해 단숨에 세계 전화기 시장을 석권했고 컬러TV방송을 허가하면서 컬러TV강국이 된 경험을 갖고 있다. 최근 정부의 선도적인 노력에 의해 DMB와 와이브로 같은 정책적 성공작도 있지만 더욱 좋은 것은 시장의 창의성과 역동성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곽치영 한국위치정보 회장 kwack@visionplan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