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다음 영웅을 기다려라=“한국은 개혁보다 평화를 선택했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국내 최초 외국인 대학 총장 로버트 러플린이 2004년 7월 카이스트에 부임한 이후 2년간의 임기를 끝내고 연임에 실패한 뒤 떠나면서 남긴 메시지다. 러플린 전 총장은 카이스트는 물론 한국 과학 및 교육계의 발전에 기여하기를 꿈꿨지만 한국사회는 러플린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의 원칙은 맞지만 KAIST인들이 함께 하기에는 개혁속도가 너무 빨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노벨상 수상자’ ‘첫 외국인 총장’ 등 화려한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러플린은 자신이 ‘명목상의 총장’이었다고 고백한다. 예산 운영권과 교직원 임명권 및 해고 권한이 없었으며 유일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은 대중 연설이나 기고 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권한이 없는 총장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사람들도 없었고 그토록 원했던 대화도 힘들었다. 교수들의 의견 수렴없이 이사회가 일방적으로 임명한 파란눈 총장의 과감한 혁신정책은 카이스트 내부의 반발을 더욱 심화시켰다. 결국 연임에 실패하고 한국을 떠났다.
본문에서 러플린은 “과학기술 종사자들은 과학기술을 신화적인 관점으로 접근하고 설명하는데, 이는 자신들이 하는 일을 일반 노동자의 일들보다 고결하게 보이게 해서 직업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직업 안정성만을 염두에 둔 사람은 혁신적일 수 없다”라는 충격적인 말을 적었다. 이 책은 러플린 전 총장이 임기를 마치며 한국에서 보고 느낀 점들을 다룬 책이다. 그가 추진하고자 했던 혁신, 총장으로 재임하며 보았던 한국의 현실과 미래, 과학과 교육의 나아갈 길, 그리고 대중에게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생각과 와전됐던 사실들을 솔직하게 담았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가볍게 적었다고는 하지만 일상의 에피소드에서도 과학적, 문화적 견해와 소신이 엿보인다. 가령 카이스트 교정에서 열린 MBC 대학가요제를 보며 시장 수요에 초점을 맞추고 경쟁력을 갖춰야만 승산이 있다는 점을 연상하고, 맛있는 한국음식을 먹으며 홍보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는 식이다.
러플린 전 총장의 수석비서관이었던 역자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상관이기보다 스승으로 삼았던 그에 대한 애정을 가득 담았다. 개혁과 혁신을 통해 한국 과학계과 교육계를 변화시켜 보고자 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뜻대로 되지 않았던 과정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했던 마음이 책 속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로버트 러플린 지음. 이현경 옮김. 한스미디어 펴냄. 1만원. 전경원기자@전자신문, kwj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