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학적으로 어떤 정책을 결정하는 데는 일반적으로 문제 제기, 해결책, 선택 기회, 참여자라는 4개의 요소가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꼭 4요소가 확실할 때만 결과가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동창회나 친목모임은 조직 내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상존하는 건 아니고, 문제가 제기돼도 해결책이 없을 때가 많다. 참여자가 제때에 참여하지 않거나 문제를 해결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창회나 친목모임은 대부분 잘 유지되고 운영된다.
이런 사례는 정부 정책에도 얼마든지 많다. 어떤 국책연구소의 예산이 다른 예산과 함께 국회 심의를 거치는 경우를 상정해 보자. 연구소 책임자는 예산 규모가 심의 과정에서 절반쯤 깎일 거라는 판단 아래 원래 계획보다 두 배 정도를 불려 신청한다. 그러나 의원들은 날마다 싸우다가 마지막날 시한에 쫓겨 사안별 검토를 생략한 채 예산을 일괄 처리해 버린다. 이렇게 되면 이 연구소의 예산은 뜻하지 않게 두 배가 된다는 것이다.
1970년대 말 미국의 행정학자 제임스 마치는 150개 대학의 총장을 대상으로 의사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조사했다. 총장들의 일주일 스케줄을 10분 단위로 쪼개본 결과 그들이 하는 일의 70∼80%는 사람을 만나고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대학 총장들의 사례는 장·차관이나 기관장들의 의사결정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게 마치 교수의 결론이었다.
마치 교수가 이 결과를 토대로 완성한 의사결정 모델이 이른바 ‘쓰레기통 모형’(Garbage Can Model)이다. 정책 결정자들에 의해 이뤄지는 의사결정 과정이 흡사 쓰레기통이 일시에 비워지는 것과 같다는 얘기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평소에는 소모적인 논쟁이 되풀이되다가도 어떤 순간에 무슨 사건이 발생한다든지, 시기적으로 꼭 해결해야 할 시점이 되면 꽉 찬 쓰레기통이 비워지듯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된다는 것이다.
엊그제 KT가 지지부진 진척이 없는 정부의 IPTV 정책을 쓰레기통 모형에 빗댄 보고서를 내놓았다가 홍역을 치른 모양이다. IPTV를 몇 안 되는 미래 먹거리로 여기는 KT로서는 오죽 답답했을까 싶지만 중요한 정책들이 실상은 쓰레기통 모형으로 의사결정이 된다는 게 씁쓸할 따름이다.
IT산업부·서현진부장 jsu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