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칼럼]통일워드, 통일쉬트, 통일오피스](https://img.etnews.com/photonews/0607/060725115147b.jpg)
북한이 예고 없이 미사일 시험발사를 한 후 개최된 제19차 남북 장관급 회담은 예상대로 아무런 합의도 이끌어내지 못한 채 결렬됐다. 이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이산가족 상봉도 전격 중단됨으로써 한반도 주변의 정치 및 외교 상황은 매우 어려워지고 있다.
장관급 회담과 유엔 안보리의 성과와는 관계없이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합의문 또는 결의안 같은 결과를 표현하는 문서의 유무를 지적할 수 있다. 남북 장관급 회담은 차기 회담 일정을 포함하는 공동보도문을 채택하지 못한 채 예정보다 하루 앞당겨 조기 종결됐고, 유엔 안보리 결의안은 일본이 제출한 초안을 놓고 미국·중국·러시아 등 핵심 이사국이 수차례에 걸쳐 조정하고 수정한 끝에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장관급 회담,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회담, 식량이나 비료 지원 회담, 경제협력 회담 등 수많은 남북 회담에서 공동보도문 같은 결과물을 도출하는 과정을 보면 작은 사항 하나를 합의하는데도 복잡하고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남북 당사자가 모여 회의를 할 때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합의에 이르고, 합의 내용을 문서로 만들어 이에 서명한 후 각자 보관하는 것은 일반적인 회의록을 만드는 과정과 같다. 남측에서 회의를 주관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워드프로세서로 합의문 초안을 작성·인쇄한 뒤 북측의 당사자에게 보여주면, 그들은 사용된 단어와 조사를 하나하나 검토해 의견을 제시한다. 남측은 이를 받아들여 수정한 후 다시 인쇄해 재검토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때 회의록 검토는 반드시 인쇄물(통상 A4 용지)을 통해 이뤄진다. 정보화가 발달된 요즘에도 컴퓨터 통신이나 전자파일을 사용하지 않고 종이에 인쇄한 후 검토 및 수정 절차를 거치고 있다. 얼마나 비효율적인 일인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결의문 초안을 어떻게 작성하고 있을까. 유엔 회의장에는 무선 랜이 설치돼 있고 회의에 필요한 자료는 영어로 작성돼 실시간으로 공유 또는 송수신된다. 이번 대북 규탄 결의안은 아마도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로 작성된 후 수정을 거쳐 최종안을 만들어서 공유하고 표결에 부쳐졌을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최종 결의안 문서는 안보리 자체의 형식에 맞추어 정식으로 인쇄하고 관리번호 등이 부착된 바코드를 추가해 PDF 파일의 형태로 유엔 사이트에 올라와 있다.
남북 경협활동의 일환으로 사흘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이틀에 걸쳐 실무적인 사항을 토의한 결과 합의에 이르렀고, 우리가 가져간 노트북PC를 활용해 회의 내용을 문서화하고 이를 북측에 보여주면 자기네 PC로 다시 입력한 후 인쇄해 교정을 보는 데 한나절이 꼬박 걸렸다. 최종 회의록도 상부에 보고해 결재를 받는 과정에서 부가 의견이 생기면 다시 협의하고 반영하는 데 거의 한나절이 또다시 지나갔다.
100여개국의 회원국이 함께 모여 회의를 하는 유엔에서도 쉽게 문서를 공유할 수 있는데,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남북한 간에는 한글코드 체계와 문서관리 소프트웨어가 달라 문서 공유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해 보고자 지난 2002년에 남북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 개발을 북측과 합의해 남측의 기술 지도하에 ‘통일워드’라는 프로그램을 북측에서 개발한 적이 있다. 개발 당시에는 남과 북이 함께 사용하기로 하여 우리 측에서 사용자 설명서도 만들고 CD로 제작해 수백 부를 북측에 전달했는데 일부 사용하다가 지금은 유야무야돼버렸다. 통일워드 같은 워드프로세서 외에도 ‘통일쉬트’ 같은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과 ‘통일 오피스’라는 문서 자동화 패키지 개발을 다시 한번 추진해 볼 만하다.
지나간 일이지만 남북 간의 코드체계나 키보드에서의 자판 배열이 다름을 인정하고, 그외의 사용방법 차이를 최소화해 남과 북이 ‘통일워드’를 각자의 방식대로 사용하는 데 큰 불편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책적인 이유로 함께 사용할 수 없어 아쉬운 마음 금할 길 없다.
◆천방훈 삼성전자 전무 benchun@sams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