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고객 배려하는 은행 되기를…

 민영화됐다는 은행이 아직도 관치시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이달 개정된 전자서명법이 발효돼 범용 공인인증서를 신규로 발급받아야 하는 고객이 은행의 외면으로 불편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은행들이 금융결제원(금결원)이 아닌 타 공인인증기관과 등록대행 계약을 하지 않고 있는 탓이다.

 은행들은 외환위기가 관치금융의 폐단 때문이었다며 지금까지 관치독립을 소리 높여 외쳐 왔다. 고객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거대 외국계 은행에 대항하기 위해 은행을 중심으로 보험·증권·신용 등 금융산업을 통폐합해야 한다며 혁명적인 금융산업 발전까지 꾀하고 있다. 이처럼 고객 우선주의로 환골탈태 의지를 보이던 은행이 가장 기본적인 범용 공인인증서 발급을 위한 편의마저 제공하지 않는 태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고객 편익과 경쟁력 강화를 내세운 은행의 금융산업 통폐합 주장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새삼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전자서명법이 개정된 것도 표면적으로야 금결원의 독과점 때문이지만 그 근원에는 은행이 자리잡고 있다. 은행은 전자서명제도가 도입된 이래 한결같이 금결원의 공인인증서 발행만을 대행해 왔다. 은행과 금결원은 한솥밥 식구나 마찬가지니 그럴 수도 있다 하겠지만 경쟁사는 고사위기를 맞았다. 범용 공인인증서 발급 수요가 대부분 은행권에 편중돼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금결원이야 은행의 자율적인 선택이었을 뿐이라고 강변했지만 주위의 시선은 따가웠다. 금결원의 보이지 않는 압력과 은행의 자기 식구 챙기기가 크게 작용했다는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공정위의 제재도 피할 수 없는 듯 보였지만 다행히 새로 발급되는 범용 공인인증서는 당분간 금결원에서 발급하지 못하도록 전자서명법이 개정돼 문제는 해결되는 듯 보였다.

 개정된 법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은행 협조가 절대적이다. 범용 공인인증서를 신규로 발급받아야 하는 사람은 대부분 은행권 고객이다. 법개정으로 수많은 고객이 오히려 불편해진다면 곤란하다. 법 개정이 아무리 건전한 산업발전을 위해서라지만 고객에게 불편을 감수하라고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정보통신부는 이를 우려해 지난 4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21개 은행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성과는 전무했다. 결국 이달 들어 많은 은행 고객이 범용 공인인증서를 발급받지 못해 불편을 겪기에 이르렀다. 범용 공인인증서야 은행이 아니더라도 공인인정기관에서 직접 발급받을 수 있지만 아직은 많은 고객이 이를 잘 알지 못하고 있고 불편하기도 하다.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던 고객 편의와 한솥밥 금결원과의 유대 가운데 어느 쪽이 진정 중요한가를 은행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은행은 더 나아가 타 공인기관에 별도로 전용선을 구축하기가 불편하니 금결원의 전산망을 이용하면 등록을 대행해주겠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고 있다. 얼핏 타당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은행 주장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첫째는 고객 편의보다 자신의 불편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점을 자인하는 꼴이다. 은행이 고객 편의를 중시한다면 공인인증기관이 비용을 부담하는 전용선을 따로 구축하는 불편쯤이야 감내해야 한다. 둘째는 은행은 중앙 집중식 전산망이 트래픽 집중으로 부하가 매우 커지는데다 어느 한 곳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전체 시스템이 장애를 일으키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금결원은 은행 금융전산망을 공동으로 구축하고 관리했지만 은행 스스로 문제가 많다며 대부분 여기서 탈퇴했다. 은행이 진정 금융거래의 시발점이 되는 범용 공인인증서 발급서비스를 금결원의 전산망으로 다시 집중 시키기를 원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