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체뿐만 아니라 모든 무생물까지도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 과정을 거친다. IT 제품도 마찬가지로 탄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이 있다. 지금같이 어제가 옛날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빠르고 급박하게 변화하는 IT 업계에서 이러한 탄생과 성장의 과정을 한번 돌이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세상 모든 발명품이 그러하지만 특히 IT 제품은 기발한 아이디어 혹은 각고의 노력으로 탄생한다. 국내 IT 업계의 연구개발이나 제조업 분야는 미국 등 선진국이 개발한 원천기술을 응용해 제품화·상품화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이러한 응용기술은 원천기술이나 예전의 굴뚝산업 제품들, 150년을 우려냈다는 우동 국물과는 달리 진입장벽이 낮다.
탄생 초기 IT 제품은 시장 규모가 작고 특수 소비층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된다. 시장 초기에는 제품 형태나 기능·사양이 소비자 취향과 요구에 맞는 형태로 서서히 변한다. 소비자 선택에 맞춘 신속한 제품 개발이 경쟁요소가 되며, 이런 점에서 소규모 벤처기업이 대기업에 비해 경쟁 우위를 갖게 된다. 규모가 작은 시장이나 시장의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초기 시점에 일종의 진입 장벽이 되는 것이다.
IT 제품 성장기의 시장은 소규모 벤처기업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고 대기업이 본격적으로 뛰어들기는 아직 작은 과도기적 규모다. 여러 제품이 많이 유사해지기는 했지만 끊임없이 다양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는 시기다. 이러한 시장에서는 구매력과 유통 능력을 기본으로 제품 개발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중견기업이 경쟁력을 갖게 된다. 어중간한 시장 규모가 소규모 벤처기업에, 또 대기업에도 진입 장벽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제품 성숙기에 접어들면 시장 규모는 글로벌하게 커지고 거의 모든 제품의 기능이나 형태·사양이 매우 비슷해지게 된다. 이 시점에서는 무엇보다도 가격·디자인·브랜드가 경쟁요소가 되고 이는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됨을 뜻한다. 규모가 클수록 구매력이 있어 제품 단가를 낮출 수 있으며 디자인과 브랜드 마케팅에 대규모 투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결국 성숙기에 놓인 시장은 대기업 중심으로 재편되게 되고, 이때에는 대기업의 구매력이나, 디자인·마케팅 투자 능력이 진입 장벽을 만들게 된다. 글로벌 시장도 최근에는 인터넷 등의 영향으로 수출입이 매우 쉬워졌기 때문에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마찬가지로 도태될 수밖에 없다.
최근까지 국내 IT 업계의 주를 이뤘던 휴대폰과 MP3 사업이 어렵다는 얘기가 많이 들려온다. 디지털TV나 PC 시장에서 선전해 오던 중견기업도 힘들다고 한다. 이는 시장이 이미 성숙기에 접어들었고 낮은 진입 장벽으로 인해 대기업, 글로벌 브랜드와 저가 중국 제품 사이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 가장 중요한 요소인 글로벌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원인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소규모 벤처나 중견기업, 대기업이 각자 규모에 맞게 상황에 따른 진입 장벽을 구축해 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기업 생명이 위태해지는 순간은 바로 진입 장벽이 무너지는 때다. 진입 장벽이라는 것이 차별적이고 매우 난해한 수준의 원천기술일 필요는 없다.
물론 특허로 보호받을 수 있는 원천기술이 가장 좋고 바람직한 진입 장벽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때로는 작은 시장 규모도 진입 장벽이 될 수 있으며 국내의 지상파 DMB나 일본의 ISDB-T와 같은 지역화된 서비스나 기술도 글로벌 브랜드 업체에는 진입 장벽 역할을 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속한 기업이 구축한 진입 장벽은 무엇이며, 이 장벽이 무너질 때 구축할 수 있는 다음 장벽은 무엇이 될 것인가. 이는 바로 우리가 반드시 풀어야 하고 영원히 시달려야 하는 숙제임이 틀림없다.
디지털큐브 대표이사 유연식 ysyu@digital-cub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