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어느 해커의 쓴웃음

 며칠 전 미국에서 한 통의 e메일이 왔다. 한국 해커들이 세계 최대 해킹대회 데프콘 CTF에서 아시아 국가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했다는 장문의 편지였다. 메일에는 해킹대회 첫 본선 진출의 감격과 동시에 한국 해커의 고단한 자화상이 그대로 묻어났다.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해커가 메일을 보내와 그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미국에서 돌아온 해커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해킹과 보안 지식, 이를 전달하는 내용 외에는 다른 어떤 사적인 얘기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실명을 말하지 않고 웹에서 쓰는 ID로 통성명을 했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본선 6위의 성적을 올리기까지 예선에서 많은 문제를 해결한 숨은 공로자 이야기를 하며 말문을 열었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미국 비자 발급 문제로 본선 대회에는 아쉽게 참가하지 못한 이승진씨(세종대)의 역할에 박수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이씨가 본선에 나가지 못하게 되자 한국팀은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는 학생들을 팀원으로 합류시켰다. 그들은 대회 내내 하루 한 끼 정도의 식사를 하며 노트북PC 4대로 서버 수준 장비를 갖춘 외국 팀과 맞서 대회를 치렀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한국팀은 우수한 성적을 거뒀고 데프콘 해킹대회 폐막식에서 전 세계 해커와 보안계 인사들의 환호를 받았다고 했다.

 그는 이런 결과에도 여전히 한국 사회는 해커가 발붙이기 어려운 곳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본명을 말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해킹과 보안도 마찬가지다. 최신 해킹 기법을 알아야 그에 대한 적절한 보안 방법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에는 실력 있는 해커가 활동할 수 있는 사회적 인식과 환경이 조성돼 있지 않다.

 해커라면 먼저 색안경을 끼고 보는 풍조, 양심적인 해커마저 억압하는 법과 무리한 적용, 합리적인 인재양성 투자 부재가 국가 보안과 산업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해커는 공격자임과 동시에 최고의 정보보호 전문가다. 양심적인 해커와 이들을 국가 정보보호 인력으로 기를 수 있는 현실성 있는 대책 마련이 아쉽다.

김인순기자@전자신문, ins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