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진흥위원회 영상팀 코디네이터. 지난 3월부터 사용해온 내 명함에 있는 내 직함이다. 위원회 안에서든 현장 영화인들에게든 설명하는 데 최소한 10분 이상 소요되는 직함이다.
1978년 영화진흥공사에 설치된 녹음실 이후 지금까지 근 30여년을 녹음, 현상, 촬영용 세트, 디지털 시각효과 등 한국영화 제작의 기술적 발전을 도모해온 영화진흥위원회의 기술사업부. 아직 꽃다운 나이였던 90년대 초반의 남산 영화진흥공사 시절이 생각난다.
한국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며 위용을 과시했던 녹음실도, 후시녹음이 전반적이던 그 시절 후반녹음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했던 공사 녹음기사님들의 권위, 막 들여와 박스 포장도 아직 벗기기 전인 카메라나 특수 촬영장비들을 우선 순위로 확보하기 위해 다른 팀들과 벌였던 숨막히던 경쟁 등등 그 당시는 최신의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선 영화진흥공사의 많은 것이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이제 겨우 10년이 조금 넘었다.
강산이 단 한번 바뀌고 조금 지났을 뿐인데 한국 영화계는 너무 많은 것이 달라져 버렸으며 그 변화는 나날이 가속화되고 있다. 할리우드에서조차도 대작들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디지털 색보정을 비롯한 ‘디지털인터미디어트(DI:Digital Intermediate)’를 한국영화의 거의 대부분이 채택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한 업체만 해도 수십개에 이른다고 한다.
10여년 사이의 영화 기술적인 측면은 정말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진화를 해온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변화의 흐름을 주도한 것은 젊은 현장 영화인들이었으며 1999년 영화진흥공사에서 영화진흥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위상을 바꾸었음에도 영진위 기술사업부의 자리는 그냥 거기, 10년 전 그 자리에서 그다지 많이 발짝을 떼지 못하고 있다.
영화인을 위한 영상인프라 구축, 원스톱 서비스의 구현이 존재의 이유이나 그 서비스를 받을 영화인들은 어느샌가 그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민간 업체들과 친구가 되고 조력자가 되어 영진위의 곁을 참 많이 떠나가 버린 것이다.
이토록 아슬아슬하게 가늘어진 그 연결고리를 한 겹 한 겹 땋아내는 일. 그 일이 바로 코디네이터의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서비스‘ 가 서비스가 되려면 정한 규칙을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요구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나의 규칙을 변화시키야 한다. 지금과 같은 구조와 마인드로는 그 어떤 일보다도 공기관이 하기 가장 어려운 일이라 생각된다.
영화 분야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의 하나가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다. 그러니 이러저러한 시행방침에 맞춰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공기관에서 ‘케이스 바이 케이스’가 모든 판단에 선행하는 집단과 어떻게 융합될 수 있을 것인지 회의적이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정말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다 못해 ‘딴나라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젠 서로 농담조차 섞지 않는다. 양방간에 참 많은 오해 혹은 몰이해가 있었으며 이젠 철저한 무관심이 벽을 쌓아버렸다.
이쯤에서 슬픈 사랑의 상징인 견우와 직녀, 그들에게 허락된 단 하루, 칠석에 대해 얘기해 보자. 하늘도 그들의 슬픈 사랑에 감흥해 어김없이 그날은 비가 내린다. 참 신의 냉정함을 원망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잊고 있는 것이 있다. 그들은 사랑에만 눈이 멀어 잘못을 저지른 무책임한 연인이었다. 소치는 청년 견우는 백성들을 위해 소치고 밭고랑 메는 일을 소홀히하였으며 베 짜는 처녀 직녀는 백성들의 옷을 지을 베를 짜는 일을 아예 그만 두었던 것이다. 백성과 하늘의 경고가 있었으나 그들은 그 경고를 무시했으며 결국은 천형을 받고 말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고’를 인식하는 일이다. 무형의 혹은 유형의 경고 사인들. 그 사인들을 더 늦기 전에 깊이 새겨 넣는 일. 그 사인의 불빛을 더 선명하고 더 반짝일 수 있도록 다듬어내는 일, 그 일이 바로 ‘코디네이터’라는 직함이 생겨난 이유일 것이다.
◆류진옥 영화진흥위원회 기술전문위원 imgemini@kof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