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전략물자 통제의 어제와 오늘

[열린마당]전략물자 통제의 어제와 오늘

 중국은 예로부터 그네들이 사는 곳을 둘러싼 바깥세상을 네 방향으로 나누어 그곳에 사는 사람을 깔보아서 만이융적(蠻夷戎狄)이라고 불렀다. 즉 네 방향에 따라 남쪽에 살면 남만(南蠻), 동쪽은 동이(東夷), 서쪽은 서융(西戎) 그리고 북쪽은 북적(北狄)이라고 칭하며 자기들과 구분지었던 것이다.

 여기서 벌레나 짐승에 비유한 만(蠻)·적(狄)과 달리 이(夷)는 큰(大) 활(弓)을 뜻하는 것을 볼 때 중국은 적어도 동쪽에 사는 민족을 두렵고 무서운 존재로 알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래서인가. 우리 역사에는 활과 관련된 얘기가 많고,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에 나오는 고주몽이나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당대 최고의 활쏘기 명수였음을 보아도 우리가 동이로 불린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가 않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칼쓰기에 능한 왜군과 근접전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 적선을 멀리 두고 포격전으로 연승을 거둔 것도 활이 포로 바뀌었을 뿐 우리 민족의 유전형질을 잘 활용한 것과 같다. 천자총통에 넣고 쏘는 대장군전은 180㎝의 길이에 60㎏가량의 무게를 가지고 있어 마치 오늘날의 미사일처럼 600m 이상을 날아가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했다. 과학의 발달로 화약을 사용하게 되면서 우리는 활을 대포로 발전시켰고, 일본은 조총을 발전시킨 것은 흥미로운 비교가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우리의 대표적 무기인 활과 포에 빠질 수 없는 주요 원자재가 우리나라에서는 생산이 안 된다는 점이다. 활을 만들려면 산뽕나무·소힘줄 등 8가지 재료가 필요한데 그중 물소뿔은 우리나라에 없어 주로 중국에서 수입해 왔고, 화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유황은 주로 일본과의 교역을 통해 얻곤 했다.

 그러나 중국은 우리의 약점을 잘 알기에 핑계만 있으면 물소뿔 교역을 금했다. 성종 때도 우리가 만주족에게 이를 전매한다는 핑계로 수출금지령을 내렸고, 간곡하게 해제를 요청하면 매우 제한적으로 허용하곤 했다. 유황은 형편이 나아서 전시에 대비한 비축물량을 웬만큼 유지했고 오히려 일본인의 잦은 구매 요청을 거절하기 바쁜 지경이었다.

 물소뿔 구하기가 워낙 어려워 살아 있는 물소를 가져와 키워 보기도 했지만 아열대지방의 동물이 우리 겨울 날씨를 견딜 재간이 없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중국의 엄격한 무역통제 아래서 물소뿔을 확보하는 것은 조선왕조의 국방당국자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수출입 규제에는 시대가 따로 없다. 전쟁의 위험은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언제고 일어날 수 있다. 더욱이 과학이 발달하면서 첨단 전자부품을 사용하는 고도의 정밀과학무기나 적은 경비로 큰 살상 효과를 내는 생화학무기가 개발되고 있어 국가가 아닌 테러단체들에도 효과적인 대체무기로 활용될 가능성이 커졌다.

 따라서 냉전시대에도 공산권 국가로 첨단제품 유출을 막기 위해 코콤(COCOM) 규제가 있었지만 점증하는 테러 위협과 대량파괴무기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더욱 강화된 캐치올(catch-all) 규제 등과 같은 전략물자 무역관리제도를 운용중이다.

 옛날에는 중국이 이러한 통제를 주도했으나 지금은 미국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것을 어기고 수출하면 해당 업체는 대미 수출 등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고, 국가신인도까지 떨어지게 된다. 조선시대에도 우리 정부는 물소뿔을 얻기 위해 항상 노심초사했고, 만주족 등에게 이를 불법적으로 재수출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무역협회는 전략물자무역정보센터를 설치해 자율적인 통제시스템을 조기 안착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일본과는 달리 일부 대기업을 빼놓고서는 아직 인식이 덜 돼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율적으로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타율적으로 혹독한 조치를 당하는 것이 이 제도의 원리임을 깨닫고 모두 기꺼이 동참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고광석 전략물자무역정보센터장·무역협회 전무

 stoneox@kit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