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이야기’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인문학’이 처참한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카트리나가 빠져나간 후 찢겨질 대로 찢겨 화려했던 재즈의 밤거리가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흉물스런 뉴올리언스 같다. 인문학의 위기는 카트리나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전국적인 이슈로 부상했다. 인문학의 위기를 걱정하고 탄식하며 특단의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간다.
그 사이 바다이야기 후폭풍으로 생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게임장 업주들의 성난 목소리는 묻혀버렸다. 게임용 경품까지 없애겠다는 대책 없는 소리도 들리지만 여기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별로 없다. 바다이야기 후폭풍은 게임산업계가 혹독하게 겪고 있지만 그 자리를 인문학의 위기가 대신 차지해버린 느낌이다. 카트리나 후폭풍으로 뉴올리언스 시민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아닌 밤에 홍두깨격으로 부유한 뉴욕 시민의 치안이 논란거리가 된 듯한 모양새다.
인문학의 위기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은 위기를 맞고 있는 게 분명하다. 취업난과 생존 문제가 다급한 젊은이들에게 문사철(文史哲)로 대표되는 인문학은 ‘남산의 샌님’처럼 철없고 한가한 놀음쯤으로 느껴질 법도 하다. ‘디지로그’로 장밋빛 비전을 제시한 이어령 교수도 우리 사회의 지하수인 인문학이 외면당하는 현실을 우려하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인 것은 충분히 인정하겠으나 일부 학자가 말하는 ‘언제 어디서나 존중받고 지켜져야 할 독립적인 영역’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인문학도 엄연히 사회현상에 따라 부침이 일어나는 수요와 공급의 산물이다. 서양 중세시대에는 신학만이 존재했다. 르네상스시대에 와서 인문학은 자연과학과 함께 비로소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동양에서는 오랫동안 지배적인 인문학에 눌려 자연과학은 설자리가 없었다. 조선후기 실학운동은 동양의 인문학 위주 학문적 전통을 뒤집기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학문이란 ‘사회의 지배적 틀을 제공하는 지하수’인 셈이다. 따라서 사회의 지배적 틀이 변하면 학문도 변하게 마련이다.
우리가 맞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는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지배적 틀이 바뀌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 사회의 지배적 틀이 지식 사회, 정보화 사회, 디지털컨버전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일명 제3의 혁명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문학에 앞서 자연과학 즉, 이공계의 위기가 시작된 지도 오래다. 현 시대의 지배적 틀은 기존의 인문학도, 자연과학도 아니라는 얘기다. 지금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위기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기를 거부하려는 기득권층의 거부감에서 비롯된 부정적 표현에 다름아니다. 바꿔 말하면 르네상스 때나 조선후기 때처럼 학문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고 있다는 신호다.
이 대목에서 불현듯 박지원의 ‘허생전’ 생각이 나는 건 왜일까? 박지원은 당시 주자학에 빠져 있던 양반 유생들을 허생원이라는 인물을 통해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을 주창했다. 지금 논란이 일고 있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위기를 박지원을 비롯한 실학자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기존 학문의 틀을 깨고 변화와 혁신을 이루고자 실학으로 분연히 일어섰던 실학파 같은 존재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지배적 틀을 제공하는 학문은 과연 무엇일까. 신학도, 인문학도, 자연과학도 아니라면 사회과학이란 말인가. 아니면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학문이 큰 물줄기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유성호 논설위원@전자신문, shy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