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고욤과 감, 토끼와 노루

[ET단상]고욤과 감, 토끼와 노루

우리나라는 서구에서 장장 3세기에 걸쳐 일궈온 산업사회를 단 40년 만에 졸업하고 지금은 오히려 미래 정보화 사회를 그들보다 한발 앞서 열어가는 중이다. 이와 관련, 정부는 대망의 21세기를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이라는 국정의제로 대비하면서, 과학기술부를 부총리 부처로 격상해 범부처 합동으로 헤드쿼터인 ‘과학기술 혁신본부’를 창설해 일사불란한 추진을 도모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혁신본부는 지난 2년 동안 부처 간 첨예하게 대립돼오던 견해를 양보와 설득으로 조율해가면서 국가과학기술을 혁신하는 데 필요한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축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연구현장의 목소리에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왔다. 조정기능 수행에 필요한 제도·수단을 단기간에 확보하는 저력을 보였는데, 그중에서도 과학기술장관회의의 정례적 개최는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부처마다 경쟁적으로 토해내던 과학기술 정책과 사업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국정현안을 과학기술 차원에서 접근, 해결하는 국가 최고위 협의기구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제 국가과학기술 혁신에 필요한 정부 시스템은 대부분 구축됐다. 하지만 더욱 확실한 성공을 위해서는 몇가지 관점에서 상시적인 점검이 필요해 보인다. 첫째 국가혁신시스템(NIS)의 분야별 발전로드맵이 적정하게 작성·추진되고 있는지, 둘째 부처 간 이견 조정에 앞서 내부 조정시스템은 원활히 작동되고 있는지, 셋째 업무처리가 법령과 자기기준에 너무 얽매여 있지는 않은지, 넷째 부처 위에서 모든 것을 다 관장하려는 과욕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등이다. 특히 정치적 고려나 성과논리 및 타율적 혁신이 지나쳐 자원의 배분과 흐름을 왜곡하고 창의성을 저해하지 않도록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새 과학기술행정체제에서 NIS의 중요한 축인 정부출연(연)의 바람직한 지원·육성 방향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연구원의 기를 살려주는 정책이면 족하다. 연구현장도 국민과 정부에 믿음을 줄 만한 자기혁신 노력을 병행해서 보여줘야 한다. 산업계의 혁신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해 연구조직과 개인에게 체화하고 이를 학계로 전파한다면 우리의 NIS는 최고의 성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혁신본부는 출연(연)의 이러한 선도적 역할을 기대하면서 ‘출연(연) 연구활성화 방안’을 수립해 매달 점검하고 있다.

 4개 분야 14개 과제로 구성된 활성화방안은 정부가 광범위한 의견수렴을 통해 지난해 9월 제10회 과학기술장관회의에서 확정한 것으로, 출연(연)의 당면과제와 애로사항을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역량강화를 위해 톱 브랜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연구계의 오랜 논란거리인 프로젝트 베이스 시스템 보완과 이를 통한 안정적인 연구 분위기 조성, 연구회 기획기능 강화 및 기관평가제도 개선 등 자율성과 책임성을 높임으로써 궁극적으로 연구기관의 생산성과 국가경쟁력 향상을 기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속담에 ‘고욤 일흔이 감 하나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고욤이 아무리 많아도 큰 감 하나를 당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성과중심 연구개발정책에 딱 맞는 말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지혜로운 선조들은 ‘달아나는 노루 보고 얻은 토끼를 놓쳤다’는 경구도 잊지 않고 있다. 정부가 대형성과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기초 소형과제를 소홀히 하고 성과중심 평가를 강화하는 것에 대한 시행착오를 우려하는 목소리로 유추할 수 있다. 미세한 수증기가 결국은 망망대해를 이루듯이 기초연구는 모든 크고 작은 성과의 출발이요, 원천이 된다. 복잡한 다원사회에서 과학기술이 중심이 되는 선진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기초와 기본에 좀 더 충실해야 한다.

연구개발은 다른 분야와 달리 자율과 창의성을 생명으로 하는만큼, 비효율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과학기술자들의 열정과 창의력을 현저하게 증진하는 장점이 있다면 그것을 과감히 수용하는 용기와 전략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여름에는 돋보이지 않던 소나무(기초)가 겨울에야 푸른 줄 알게 된다면, 정부가 창안한 최고의 정책브랜드 ‘사이언스 코리아’의 구현은 요원해질 것이다. 5년 후, 10년 후를 내다보는 지혜의 지평을 넓혀 미래의 명품이 되는 싹을 키워나가자.

◆박상대 기초기술연구회 이사장 sdpark@krcf.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