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정부 조직평가 관련 학회에 나갔을 때 어느 행정학자의 말에 참석한 전문가 대부분이 공감했다. “우리나라는 무슨 문제가 생기면 핵심문제를 직접 해결하기보다는 필요 이상으로 주변에서 참견해 대대적으로 나서다가 초가삼간 다 태우고 결과적으로 실질적인 개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부 조직 개편을 하려고 해도 그렇고, 정부제도를 개선할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늦은 감은 있지만 정부가 나서서 통신과 방송의 융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무조정실을 통해 융합기구 개편을 위한 첫걸음을 뗀 것은 다행이다. 수십 차례의 회의와 토론을 통해 융합기구 개편(안)을 마련했다. 지금까지 학계와 연구계, 산업계, 방송위와 관계부처에서 오랫동안 선진 외국의 사례와 법, 제도를 연구해 왔다. 그 자료와 연구결과만 해도 수십 권의 책으로 낼 수 있다. 조급하게 융합기구를 만들게 됐다는 의견도 있는데 이는 토론회에 참석했던 분들이 이러한 지속적인 연구 노력 과정과 결과물을 접하지 못한 데서 온 오해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방송통신융합기구 개편안과 관련한 지적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이번 개편(안)은 대통령이 상임위원을 모두 임명하기 때문에 권력 오남용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방송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공공성, 공익성, 공평성, 정치적 중립성 등이라고 한다. 현행 통합방송법하에서 방송위원회가 이러한 가치를 잘 지켜왔는지 반문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 가치보다 중요한 것이 정부기관이나 공공기관의 국민과 국회에 대한 ‘책임성’이다. 현행 방송위원회는 국민에게도 국회에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적 모순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제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구조로 만드는 것이 방송의 다른 가치를 실현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둘째, 융합 방향이 지나치게 산업지향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시한 영국은 이미 마거릿 대처 총리 시절부터 방송의 산업 측면을 강조해 현행 융합기구인 오프콤을 만들어 BBC를 제외한 모든 방송과 통신을 산업적 측면에서 지원하고 있다. BBC도 최근 최대한 산업적 측면에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은 FCC가 출범한 1934년부터 방송을 산업으로 보고 정부의 내용규제를 최소한으로 하되 전파와 주파수에 대해서는 강력히 규제하고 있다. 프랑스·독일·싱가포르 등도 이미 중앙부처에서 방송산업 발전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나라만 여전히 방송의 산업성에 대해 이야기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데 세계 각국이 무한 경쟁을 하는 상황에서 우리만 모르는 척할 수 없는 일이다.
셋째, 융합기구 개편과 관련해 기구가 지나치게 비대해진다는 비판과 더불어 여러 부처가 이때다 싶어 이런저런 이유로 IT산업과 콘텐츠산업, 우정사업 등을 탐내며 숟가락 하나 얹으려고 한다. 어려울 때는 거들떠보지 않다가 좀 된다 싶으면 욕심을 내거나 이 기회에 자기 조직 부풀리기를 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통신·방송 융합서비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 개편을 하다가 정보통신 일등국가로 가는 길목에서 초가삼간 다 태우는 상황이 될지 모른다.
지난 11월 터키 안탈리아에서 전 세계 191개국이 참석한 가운데 ITU 총회가 열렸다. 대한민국이 정보통신과 DMB, 와이브로 등의 융합서비스에서 세계 최고라는 것은 모두 인정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경쟁국들보다 기술과 서비스를 먼저 개발하고도 법·제도와 기구가 뒷받침되지 않아 이들 국가보다 경쟁에서 뒤처진다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제사보다는 젯밥’에 더 관심을 가진다면 이러한 우려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한발씩 물러서서 정말 국민복지와 산업진흥에 관심을 가지고 대화와 협상으로 합리적인 정책대안을 만들어 답답하고 힘든 국민에게 따뜻한 희망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계가 보고 비웃지 않도록.
◆최수만 한국전파진흥원장 ceo@korp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