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한국의 과학기술은 ‘샌드위치’라는 말에 자주 비유된다. 원천기술을 보유한 과학강국과 중국·인도 등 신흥국의 맹렬한 추격 사이에 끼어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발표한 ‘2006년도 IT 수준 조사’를 보면 이러한 비유가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사 결과,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기술 보유국인 미국과는 1.6년, 일본과는 2개월의 차이를 보이는 등 3년 전보다 1년 이상 기술격차를 줄였지만, 동시에 중국과의 기술격차도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사상 유례없는 고속 경제상승을 계속해온 탓인지 국민은 지금의 상황을 답답하고 부정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 상황이 매우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신흥국의 기술추격 덕분에 끊임없이 자극받고 긴장할 수 있다는 것이 첫째 이유요, 결정적인 도화선 하나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선진국의 벽을 넘을 수 있을 만큼 탄탄한 기술력이 이미 구축돼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를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끌어올릴 결정적인 도화선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인풋 대비 아웃풋이 훨씬 뛰어나도록 ‘연구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문제는 효율성을 높이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이에 대해 미국 하버드대학의 세계적인 생산전략가 스키너 교수는 그의 저서 ‘생산성 모순’에서 매우 흥미있는 대답을 했다. 생산성을 100으로 볼 때, 우리가 흔히 중요하다고 여기는 노동생산성은 겨우 20에 불과하며 나머지 80은 인프라와 기술생산성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효율적인 인프라 구축을 통한 기술혁신이 바로 연구성과를 높이는 핵심 키워드라는 얘기다.
일찍이 인프라 혁신의 중요성을 견지한 정부는 지난해부터, R&D 패러다임의 전격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사이버상에서 시공을 초월해 자유로운 협업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e사이언스 연구환경’ 구축이 바로 그것이다.
e사이언스 연구환경이 구축되면 초고속 네트워크라는 인프라스트럭처 위에 전 세계의 연구자가 슈퍼컴퓨터, 천체망원경 같은 첨단 연구장비를 공동으로 사용하고, 대용량 데이터를 자유자재로 주고받으며, 동시에 전문 인력자원까지 공유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따라 기존에는 시도하기 힘들었던 천문우주·지구환경 등에 관한 범지구적인 R&D가 가능해지고, 생명공학·나노·고에너지물리·항공우주 등 여러 연구 분야가 융합된 종합적인 협업연구를 하는 것이 매우 수월해진다. 이러한 e사이언스 연구환경이 국내 과학기술계에 정착되면 R&D에 투자되는 시간과 비용은 수십배 이상 절약되고, 연구성과의 수준도 급격히 높아진다.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KBSi) 산출자료에 따르면, e사이언스 연구환경을 통해 국내 연구자들이 초고전압투과전자현미경을 공동 활용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관련된 R&D 비용을 수백억원 이상 줄일 수 있고 기술개발 속도도 10배가량 향상시킬 수 있다.
이는 실로 엄청난 변화다. e사이언스라는 사이버 인프라가 성공적으로 구축되고, 이를 통한 사이버협업이 과학기술계의 일상적인 패러다임으로 자리잡는 일련의 과정이 경쟁국보다 한발 먼저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선진국의 벽을 넘는 결정적인 도화선이 된다.
더욱 다행인 것은 사업을 시작한 지 1년여밖에 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e사이언스 관련 연구가 매우 빠르게 진척되고 있다는 점이다. 수년 전부터 사이버 인프라에 집중적 투자를 하고 있는 미국·영국의 국가 e사이언스 프로젝트 수행기관과 공동연구 파트너로서 제휴하고 있으며 또한 미국 일리노이슈퍼컴퓨팅센터(NCSA)에 오히려 우리가 개발한 가상수치풍동 연구환경(e-AIRS) 기술을 전수할 정도다.
무조건 허리띠를 졸라매야 수출을 늘릴 수 있고, 밤을 새워야만 좋은 연구성과가 나오던 시절은 지났다. 이제는 효율이다. 세계와의 경쟁에서 우리나라는 천연자원도, 경제기반도, 지정학적 조건까지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다. 다른 나라가 10을 가지고 20을 이룰 때, 우리는 5를 가지고도 30까지 오를 수 있는 탄탄한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정부와 기업 그리고 국민 모두가 첨단 사이버 인프라 구축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양병태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장 btyang@kist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