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1999년 말 국내에 불었던 벤처 열풍을 회상하는 씁쓸한 목소리가 자주 들려온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벤처기업이 성공할 확률은 1%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장기적인 전략과 철저한 비즈니스 모델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기업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대기업을 나와 벤처를 시작한다고 했던 동료들 역시 고배를 마셨고 1%의 생존율을 통과한 기업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까다로운 소비자, 급변하는 IT 환경, 제품개발과 기술력 등 무엇 하나 세계 시장에서 밀리지 않을 만큼 한국의 IT는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일부에서는 국내 최강의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국을 신기술 테스트베드로 활용하는 사례도 있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개발자가 꼭 한 번 방문하고 싶어 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 모든 기술과 혁신은 지난 벤처시절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발전돼 왔다. 그런데도 국내 대기업과 어깨를 견줄 만한 벤처기업이 없다는 현실은 아직 벤처의 길이 험하고 멀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술력을 갖고 벤처를 일궜지만 결국은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고 세계 무대로 나가려는 길목에서 발목을 잡히고 만다.
벤처기업의 경쟁력은 인적자원과 기술이다. 즉 벤처 경영에서 중요한 것은 인적자원관리를 어떻게 하느냐 그리고 얼마나 차별화된 기술을 개발하고 상품화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벤처로 시작한 나 역시 벤처기업은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열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특히 소수의 얼리어답터를 대상으로 하는 시장을 공략하다 보니 초기에는 마케팅이나 홍보, 고객서비스의 그 중요성을 지금처럼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때도 많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지난해 이후 시장이 급속도로 발전했고, 이제는 다양한 업체의 출현과 함께 시장상황은 변했다. 벤처기업이 장기적인 기업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홍보와 마케팅, 판매에 걸친 분야별 전문가 영입과 전략적인 경영환경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이제는 좋은 기술과 제품만 있으면 고객의 구매와 성공이 보장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국내 벤처기업 CEO의 다수는 엔지니어 출신이고 실제로 좋은 기술과 제품을 개발하는 데에는 능하지만 제품 개발 이후의 홍보나 마케팅, 기업경영에서는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만드는 제품은 해당 분야에서 시장 점유율이 50%를 넘는다. 이러한 성과를 얻기까지는 각자대표제 채택이 큰 몫을 했다. 기업경영과 마케팅, 연구개발 책임자를 구분해 각자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이 매우 큰 도움이 됐다. 실제로 유수의 IT기업에서는 각자대표제를 채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으며 선진국에서는 그러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많은 벤처가 생사를 반복하는 이 시대에 벤처도 달라져야 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활발한 혁신, 밤낮을 쉬지 않고 타오르는 일에 대한 열정이 벤처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세상을 움직일 만한 혁신은 오히려 작은 기업에서 일어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벤처 정신으로 똘똘 뭉친 경쟁력 있는 기술과 혁신은 내부직원의 만족과 충성에서 비롯된다. 기업의 구조적인 안정화를 꾀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전문인력을 영입해 안정된 경영기반을 갖추고, 직원들의 열정을 뒷받침해줄 수 있어야 한다.
벤처직원들의 45% 이상이 기회 혹은 조건이 된다면 다른 회사로 이직하겠다는 의향을 가지고 있다는 어떤 조사를 본 적이 있다. 기업의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직원이 장기적으로 발을 붙이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그 기업의 생존 가능성 또한 절반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기업의 경영환경이 안정적이지 못하면 직원은 떠날 수밖에 없다.
유행 아이템을 쫓는 시장 분위기, 상장만을 위한 제품 개발, 안정적인 매출을 위한 단기적인 경영전략 등 트렌드처럼 변화하는 요즘의 벤처 문화는 하루빨리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경쟁력 있는 가치와 차별성을 지닌 벤처는 대기업이 진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초심으로 돌아가 작은 고추의 매운 맛을 보여줄 때다.
◆손국일 디지털큐브 대표이사 kisohn@digital-cub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