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IT기업의 지사 위상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 한계에 와 있다.”
취재팀이 설문조사 및 면접취재를 했던 50여명의 지사장 중 절반가량이 지사 위상이 2∼3년 전에 비해 나빠졌다고 응답했다. 9%가량만이 지사 위상이 이전에 비해 좋아졌다고 대답했다. 일부 긍정적인 대답을 한 지사장은 국내 진출이 수년 이내인 새로운 영역으로 매출이 급신장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지사 위상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에 공감했다.
지사 위상이 왜 떨어지고 있을까. 이는 국내 경제규모가 적어진 데 따른 본사 기여도 부족이라는 결과와 맞물려 있는 현상이다. 또 IT산업의 성숙도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본사 기여도 낮아져=국내 지사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보다 국내 지사의 매출 성장률이 낮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경제 성장률도 갈수록 낮아질 것으로 보여, 해답을 찾기 쉽지 않은 구도다. 국내 지사의 본사 기여도는 대략 평균적으로 1∼2% 수준. 이 조차도 점차 줄어드는 추세여서 본사에서도 한국 시장에 대한 더 이상의 투자를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는 얘기가 자주 들린다. 표삼수 한국오라클 사장은 “본사 입장에서는 투자대비효과(ROI)를 보게 되는 것인데, 중국·인도·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 등의 신흥시장으로 몰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그쪽 지사들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비용절감에 몰두하는 본사 영향=전 세계적으로 IT산업이 성장 진행형의 산업이 아니라 이미 성숙된 시장이라는 점도 한국 지사의 위상을 흔들리게 하는 요인이다. 미국 회사들이 대부분인 다국적 IT기업들은 IT산업 성장률이 이전만 못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두 개의 칼을 뺐다. 하나는 인수합병을 통한 매출 확대며, 또 다른 하나는 비용절감을 통한 수익극대화. 이는 한국 시장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인수합병으로 지사들이 사라지는 사례가 늘고 있으며 각 지사로 할당되는 급여, 마케팅 비용 등도 크게 줄고 있는 것이다.
한 지사장은 “인도와 중국처럼 특수한 시장을 빼고는 본사에서도 각 지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 추세”라며 “특이 아시아 지역과 남미 지역에 대한 통제가 유독 강화돼 한국 지사도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즉 한국 시장에서 새로운 특수나 모멘텀이 없는 경우 갈수록 한국 지사 위상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상대적 박탈감도 위기감 가속화시켜=지사 위상 추락은 당사자들이 피부로 체감한다.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다. 불과 6∼7년 전만 해도 다국적 IT기업 지사가 국내 기업에 비해 임금 등 여러 조건에서 월등히 좋았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크게 바뀌고 있다. 매출 정체로 인해 3∼4년간 연봉이 비슷한 수준에 멈춰 있는 반면에 국내 대기업, 업종에 따라서는 통신이나 대형 포털 등에 근무하는 비슷한 경력자의 연봉이 앞섰다. 국내 대기업들도 이제 다국적 IT기업만큼의 업무환경을 지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경제규모도 커졌고 삼성·LG·현대 등 대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크게 성장하면서 일어난 일이다.
◆컴퓨팅 관련 20개사 5년치 감사보고서 분석 결과
주요 다국적기업의 한국법인들의 매출 성장세가 지난 2003년을 기점으로 큰 폭의 하락세로 들어섰다. 수익성을 나타내는 영업이익 및 순이익도 급락세를 면치 못하는 등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본지가 한국에 지사를 둔 다국적 IT 관련 주요 기업의 최근 5년간 실적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 조사 대상은 금융감독원에 감사보고서 신고한 자산규모 70억원 이상의 외국계 법인으로 한국IBM 등 컴퓨팅 업계 20개 기업이다.
매출 규모는 최근 5년간 전체적으로 상승세를 보였다. 지난 2001년부터 IT 거품이 빠지기 시작했지만, 일단 양적으로는 크기가 커진 셈이다. 그러나 성장률에 있어서는 둔화세가 명확하게 나타났다. 지난 2003년 23.3%가 증가, 거품 국면에서 회복세를 보였던 것을 기점으로 지난 2004년부터는 급락, 2005년에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한국IBM·페어차일드코리아반도체·소니 등의 2005년 매출액이 전년에 비해 하락했으며, 매출이 신장된 기업의 경우 소폭 상승에 그쳤다.
영업이입과 순이익도 매출액과 유사한 추이를 보였다. 이들의 영업이익은 지난 2004년 회복세를 보였다가 지난 2005년에 20% 정도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다. 순이익은 지난 2003년 이후 증가세를 보였지만 대체적으로 하락하는 모습이다. 이들의 실적 상승세가 그리 높지 못하자 법인세 비용마저 줄어들었다. 외국 법인의 법인세 비용은 지난 2003년을 제외하고는 하락세를 그렸다. 특히 세금내는데 ‘큰손’이었던 한국IBM도 지난 2003년 821억원을 냈으나, 지난 2005년에는 반에도 미달하는 341억원에 그쳤다.
윤문석 시만텍코리아 사장은 “국내 경기 침체로 매출 증가폭이 매년 감소하고 있다”며 “특히 매년 경쟁도 치열해져 과거와 같은 수십 퍼센트의 영업이익은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실적부담에 의사소통의 어려움까지…이중삼중고 허덕이는 지사장들
한 다국적 기업의 A 지사장은 본사와의 콘퍼런스콜(전화 회의) 때마다 초 긴장 상태에 돌입한다. 영어권 거주 기간이 5년 이상이어서 의사 소통에 어느 정도 자신 있지만 실적 등 민감한 사항에 대해선 매번 제대로 된 답변을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영어권 사람들이 자주 쓰는 부정 의문문은 그에게는 여전히 ‘의문 부호’다.
언어도 언어지만 그를 더욱 괴롭히는 건 과도한 실적 요구다. 경기 하강기에 있는 국내 실적을 감안하지 않고 매년 20∼30% 이상의 매출, 영업 이익 상승을 기대한다. A 지사장은 “미국·영국 등 본토 영어는 괜찮지만 필리핀·인도 출신 보스와의 통화는 어려움이 많다”며 “대부분 좋은 내용이 아니어서 콘퍼런스콜을 피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털어놨다.
A 지사장의 이런 고민은 비단 그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국적 IT기업에 근무하고 있는 지사장들은 실적 달성에 대한 두려움과 본사와의 마찰에 항상 시달린다. 이는 결정권이 제한된 ‘브랜치 매니저’가 가진 태생적 한계다.
이달 초 다국적 IT기업 지사장 50여명을 대상으로 일대일 면접 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 인원 대부분(97%)이 △과대한 목표치 제시 △국내 실정에 맞지 않는 지시 △외국계 기업에 대한 차별 등을 지사장 업무의 애로점으로 꼽았다.
지사장 권한 정도에 대해선 이중적인 인식이 드러났다. ‘인사·재무 권한을 모두 갖고 있다’는 답이 대부분(90% 이상)이었지만, 본사가 밀어붙이는 사안을 거부하거나 반대한 경우는 없다. 실제 본사 결정에 반대하다 본전도 못 찾고 ‘잘린’ 지사장 사례도 부지기수다.
차인덕 도시바코리아 사장은 “법인 형태의 지사장 중 대부분이 인사·재무권을 갖고 있지만 본사 결정에 반대할 수 있는 지사장은 10%도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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