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기업 국내 진출 역사는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진행한 한국은 개발을 위해 외국 자본(투자 재원의 60%)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이때 한국에 투자한 다국적 기업은 IBM(95만달러), 모토로라(754만달러) 등이다. 투자와 함께 이들은 지사 설립을 추진한다. IBM은 경제기획원 통계국에 ‘IBM 1401’을 납품하면서 국내 지사를 세웠고, 국산 주전산기 기술이전을 맡았던 컨트롤데이터를 비롯해 후지쯔, 스페리랜드(유니시스 전신), 바로스 등이 뒤를 이어 국내에 들어왔다.
◇80년대 IT코리아 가능성 열려=“미래 한국 시장은 큽니다. 현재 컴퓨터 도입 움직임이 일고 있는 이때 후지쯔가 기증하는 셈치고 무료로 빌려주시면 틀림없이 인과응보가 있을 것입니다.”
당시 이은복 한국생산성본부 이사장과 후지쯔 본사 경영진과의 대화다. 이 사장의 설득은 60만달러에 달하는 ‘화콤222’ 임대 계약으로 이어졌다.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한국은 외국 기업 원조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가능성’을 바탕으로 밀어붙인 정부 노력에 따라 65∼67년, 3년간 20개가 넘는 기업이 진출한다.
70∼80년대 우리나라는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정부가 약속한 가능성을 실현했다. 특히 80년대 국민 PC보급 운동을 시작으로 형성된 1인 PC시대 서막도 이들에겐 매력적이었다. 삼성HP(84년), 인텔코리아(89년), 한국썬(91년) 등 글로벌 대형 업체의 지사 설립은 국내 IT 성장 가능성을 정확히 포착한 선택이었다. 99년에 이르러 국내 PC 시장은 1조원을 넘어섰다.
◇대리점에서 합작사로=80년대는 대리점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본사의 경우 직접 투자를 부담스러워했고, 국내 기업은 기술 이전을 원했다. 이들 대부분은 1990년대 전후로 국내 지사로 옷을 갈아입는다. 86년 대우통신이 공급하던 ‘PC 프로1000(XT)’ 가격이 110만원 정도로 일반 회사원 월급(40만원)에 비해 2배 이상 비쌌기 때문에 유통은 신용장(LC)을 열 수 있는 대기업 몫이었다.
현대전자는 썬의 스팍, 클론을 유통했으며, 메티어스와 기술 도입 계약을 했다. 대우통신은 버디스(유니시스 합병사), 삼성전관은 NEC 에이코스 메인프레임을 각각 판매했다.
이 밖에 금성사(LG전자의 전신)는 하니웰 제품을 국내에 판매했다. 이 시기 1984년 삼성-HP 합작사 출범은 국내 컴퓨팅 환경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로선 보기 드문 ‘기술 이전 계약’이어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삼성HP 설립은 ‘KS5610’이라는 한글코드를 완성하는 데 일조하는 등 국내 컴퓨팅 기술 발전을 한발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삼성HP SW연구소에 재직, 한글프린터 시장을 개척한 이상은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 단장은 “이후 국내 경제력 증가로 다국적 기업 직접 진출이 일반화됐다”며 “하지만 과거 대리점, 합작사 설립은 한국 컴퓨팅 기술의 근간을 이룬다”고 밝혔다.
◇20세기 말, M&A 회오리에 휩싸이다=IMF 구제 금융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때마침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인수합병(M&A) 열풍과 함께 국내 지사는 생사가 엇갈렸다. 시게이트·노벨·소텍컴퓨터 등은 매출 감소로 지사가 철수했다. 특히 IBM·HP·오라클 등 대형 업체들은 IT기업을 다수 M&A해 해당 국내 지사도 사라졌다. 인포믹스·디지털이큐입먼트·시벨·스텔런트·파일네트·ATI 등이 합병으로 한국 지사 역사를 마감한 대표적 업체다.
21세기 들어서도 M&A로 인해 간판을 내린 지사는 컴팩·다큐먼트·레가토·베리타스·스토리지텍 등으로 계속 이어졌다. 물론 IT 확대, 발전에 따른 신생업체도 계속 출현해 IT 지사 지형도는 지금도 변하고 있다. 특히 2000년 이후 진출 업체 국적이 다양해졌다. 수입다변화 정책 폐지로 도시바·샤프 등 이른바 ‘일류(日流)’ 기업이 몰려들었으며, 중국 업체(레노버)도 한국문을 두드렸다. 2006년 현재 국내 진출 다국적 IT기업 숫자는 200여개. 단순 사무소 형태까지 포함하면 이 수치는 배로 늘어난다.
◇한국IBM IT맏형 노릇 여전=IBM의 ‘코리아 IT맨 사관학교’ 역할도 여전하다. 현직 지사장 중 한국IBM 및 IBM 본사 출신 지사장은 9명으로 조사됐다. 이휘성 현 한국IBM 사장은 오창규·신재철 사장에 이어 한국IBM 출신 사장의 바통을 이어받아 2년째 사장직을 맡고 있다. 40대 초반 이른 나이에 사장이 된 이 사장은 여로 모로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지난 납품비리 사태 이후 추락한 자존심을 회복하고, 무엇보다 서비스 중심으로 변신하는 한국IBM의 후반부 역사를 책임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IBM 출신으로는 이수현(한국쓰리콤) 사장을 비롯해 한의녕(SAP코리아) 사장, 양승하(오브젝트코리아) 사장, 김태영(한국사이베이스) 사장, 강석균(한국인포메티카) 사장 등으로 대부분 20년 전후의 장기 근속자다. 정철두 넷앱 사장은 현직 지사장 중 IBM 본사에서 업무를 시작, 2000년 이후 삼성전자 서버 사업에 몸담으며 국내 시장에서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
◇첫 지사장 19명·2회 이상 경험 8명=현직이 첫 지사장직인 경우는 19명, 2, 3회 지사장을 경험한 이들은 8명으로 조사됐다. 근속연수로 볼 때 최준근 한국HP 사장이 올해로 13년째 지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뒤를 이어 8년째로 접어드는 이들은 방일석 올림푸스코리아 사장, 남기환 오토데스크코리아 사장, 그리고 합병으로 재출발한 한국루슨트-알카텔의 양춘경 사장이다. 4인 모두 오랫동안 해당 기업에 몸담으며 내부에서 승진한 경우라 업계에서 차지하는 이들의 무게감은 작지 않다.
지사장직이 5년째로 접어드는 이들은 11명으로, 조사 대상 35명 중 절반에 못 미쳤다. 관행상 다국적 IT기업 지사장의 수명이 평균 2∼3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들은 장수 지사장으로 접어든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사 대상 중 절반에 달하는 16명은 2005년부터 지사장직을 수행해와 실적에 따라서는 내년을 전후로 지사장 교체가 다시 한번 크게 이뤄질 가능성도 점쳐진다. 지난해 지사장 타이틀을 처음 단 이들은 김태영·강석균·김인교·우미영·양승하 사장 등이다.
◇ 40·50대 절반씩, 45세 이하도 6명=만 나이 기준, 올해 50세 이상의 지사장은 18명, 40대 지사장은 16명으로 조사됐다. 이중 45세 이하의 젊은 지사장들은 7명으로 우미영 지사장은 컴퓨팅 영역의 최초의 여성 지사장이자 40대 미만의 최연소 지사장이 됐다. 최고령자는 이수현 한국쓰리콤 사장으로 한국IBM을 거쳐 한국델·한국어바이어 사장을 지냈다. 현직 지사장 중 가장 많은 동갑내기는 올해 만 46세(61년생). 이휘성 한국IBM 사장을 비롯해 김형래 BEA시스템즈코리아 사장·남기환 오토데스크코리아 사장·강익춘 한국주니퍼 사장 등 4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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