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IT이슈 진단]컴퍼니 2.0 시대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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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4∼6년 뒤에 심각한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경고성 발언 여진이 아직도 상당하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우리 경제의 ‘위기론’과 맞물려 오히려 일파만파 확대되는 분위기다. 이 회장의 진위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평소 ‘은둔의 경영자’로 불릴 정도로 말을 아끼는 스타일에 비춰 볼 때 액면 그대로 ‘위기’ 만을 강조한 것은 아닌 듯 싶다. 이는 한 마디로 ‘프로세스’를 염두에 둔 말로 풀이된다. 삼성과 같은 일류 기업도 지금과 같은 경영 방식으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자성인 셈이다. 여기에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해야 한다는 절박함까지 배어 있다.

기업이 진화하고 있다. IT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경영을 둘러싼 환경이 급변하면서 자의든 타의든 변화의 소용돌이에 내몰리고 있다. 이전에는 아이디어 발굴, 시장 조사, 전략 수립, 의사 결정, 시범 실행, 마스터플랜 재수립 등 수 십번의 단계를 밟아서 주력 사업 모델을 바꾸고 이에 따라 기업도 변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이디어가 바로 실행일 정도로 속도를 중시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른바 ‘컴퍼니(기업) 2.0’ 시대의 선언이다. 2.0은 초기 단계(1.0)에서 벗어나 성장·진화해 다음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인터넷부터 시작해서 통신·미디어 등 온통 2.0 열풍이지만 컴퍼니 2.0은 워낙 변수가 많아서인지 명확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기업 흥망성쇠와 직결돼 섣부른 분석과 예단도 힘들다. 하지만 공통된 진리는 있다.

안팎으로 가장 변화가 심한 필립스·애플·델 3개 기업을 통해 컴퍼니 2.0의 해법을 찾아 보았다. 공교롭게도 이들 기업은 약속 한듯 회사 이름부터 뜯어 고쳤다.

# 생각을 바꿔라.

구글과 함께 가장 주목을 받는 기업을 꼽으라면 애플이다. 구글이 서비스와 소프트웨어가 중심이라면 애플은 하드웨어다. 76년 창업한 애플은 올해가 꼭 설립한 지 30년이 조금 넘는다. 대부분의 하드웨어 기업이 고전을 면치 못하지만 애플만은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그렇다고 사업 아이템이 녹록한 것도 아니다. 퍼스널 컴퓨터, 운용 체계(OS), MP3에 이어 최근 발표한 휴대폰까지 모두 강력한 경쟁 상대가 있거나 어느 분야보다 경쟁이 치열하다. 변화에 대응하는 애플의 전략은 상식의 전환이었다.

80년대 PC가 나올 당시 IBM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업이 전력량을 줄이기 위해 검은 배경 화면에 흰 글자를 사용했다. 하지만 애플은 흰색 화면에 검은 글자가 뜨도록 설계했다. 마우스를 눌러서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그래픽 형태의 PC OS도 개발했다. ‘아이팟’을 들고 MP3플레이어 시장에 후발업체로 뛰어든 애플은 디지털 음악 서비스 ‘아이튠스’를 통해 ‘아이팟 신화’를 만들어 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별개라는 당시 상식을 깨고 둘을 결합해 시장의 구도 자체를 바꾼 것이다. 노키아·삼성전자·모토로라 등 쟁쟁한 기업이 즐비한 휴대폰 시장에서도 애플은 ‘아이폰’이라는 제품을 들고 나와 성공적으로 신고식을 치렀다.

 

  # 고객에 답이 있다.

IT업계에서 델 만큼 변화에 앞장서고 있는 기업도 드물다. 델은 지난해 3·4분기 HP에 잇따라 세계 시장 점유율 1위 자리를 빼앗기면서 ‘컴퓨터 제왕’이라는 자존심을 구겼다. 결국 델은 일선에서 물러났던 창업자 마이클 델이 복귀했으며 ‘델 2.0’을 선언했다. 델 2.0은 다이렉트 유통 모델을 벗어나 제2 성장 모델을 만들겠다는 일련의 전략을 말한다. 델 2.0에 대해서는 다분히 선언적인 슬로건이라는 해석이 분분하지만 핵심 취지의 하나는 기본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유통 구조를 줄여 이를 통해 남는 마진을 고객에게 돌려 주었듯이 고객을 중심으로 변화를 가속하겠다는 설명이다. 델은 이런 취지에서 ‘아이디어 스톰’과 ‘스튜디오 델’이라는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 사이트에서 고객은 마음껏 제안하거나 투표를 통해 가장 인기있는 아이디어를 선정할 수 있다. 비즈니스위크는 아이디어 스톰의 경우 개설한 지 일주일 만에 1384개 아이디어가 올라왔고 12만건의 추천이 이뤄졌으며 2000여 개의 댓글이 달렸다고 전했다. 벌써 전문가들은 “아이디어 스톰이 델을 다시 컴퓨터 1위 업체로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IT전문가들은 이전까지 기업은 고객 목소리를 반영하고 고객의 욕구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앞으로는 기업 활동 전 과정에 고객이 직접 참여하는 새로운 기업의 사업 모델이 등장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 미래를 보자

노키아가 ‘핀란드 자존심’이라면 필립스는 ‘네덜란드 자본주의 역사’와 같은 기업이다. 일반인에겐 전기면도기로 친숙한 필립스는 설립된 지가 무려 100년이 넘는다. 필립스는 1891년 조명 회사로 출발했다. 기업 운명이 20∼30년도 길다고 보는데 필립스는 무려 110년 이상을 장수했다. 그것도 단순히 수명만 연장한 게 아니라 시장을 주도해 왔다.

비결은 하나다. 오늘이 아닌 내일을 보는 것이다. 1990년 필립스는 멸종 직전 공룡과 같았다. 전자 외에 음반·부동산 등 60개 사업 분야에 직원 수만 29만명이었다. 당시 창사 100주년을 한해 앞둔 시점에서 필립스는 주가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곤두박질치고 한해 적자만 27억달러에 달했다. 카세트 테이프에서 전기면도기·CD까지 1만건이 넘는 발명품을 내놓은 대표 기술 기업인 필립스는 이 때부터 기업 구조와 사업을 단순화했다. 이익을 많이 내더라도 전략적으로 가야할 길이 아니면 과감히 팔아 치웠다. 이런 전략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 때 주력이었던 반도체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기업이 차세대 성장동력이라고 꼽는 LCD도 단계적으로 버리기로 방침을 확정했다.

지금 애플·델·필립스는 ‘무한경쟁시대에 현실 안주는 기업의 도산과 직결된다’는 정글의 법칙을 실현하고 있다.

◆`필립스·델·애플` 공통점은?

 ‘필립스·델·애플’ 이들 3개 기업의 공통 분모는?

쉽게 찾기가 힘들다. 하나는 전자가 주력이고 나머지는 IT기업이다. 설립 연도도 천차만별이다. 필립스는 창업한 지가 100년이 넘었고 애플은 미국 전자 산업 초창기인 70년대 중반 당시 대학 중퇴생이었던 스티브 잡스가 설립했다. 델은 퍼스널 컴퓨터 붐이 일기 시작한 80년대 중반 창업했다. 델과 애플이 전형적인 미국 기업이라면 필립스는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유럽 기업이다.

공통점은 한 가지다. 최근에 이들은 모두 회사 이름을 바꿨다는 점.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회사 전체 이름의 절반을 지웠다. 회사를 알릴 수 있는 브랜드를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모두 빼 버렸다. 필립스는 반도체 매각 방침을 확정하면서 필립스전자에서 ‘전자’를 빼기로 했다. 이에 앞서 델과 애플도 회사 이름에서 ‘컴퓨터’를 삭제키로 했다.

‘과감한’ 변신을 택한 것이다. 변화의 의지를 위해 ‘부담’을 덜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배경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새로운 기업으로 재탄생을 선언했다.

항상 기업이 잘 나갈 수는 없다. 모든 기업은 위기와 도전에 직면한다. 이들의 변신도 미완성이자 현재진행형이다. 누구도 앞으로 10년 뒤에 이들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필립스·델·애플은 시장에서 살아 남는 기업은 1등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 보고 변화에 잘 적응하는 기업이라는 명제를 실천하고 있다. ‘변화와 혁신’이 화두인 IT업계에서 이들 3개 기업을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병준기자@전자신문, bj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