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의 한 기업이 고객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연구개발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고객가치의 중심 전략이란 경영전략이나 마케팅에서는 기본이 되는 것이지만 그 개념을 연구개발에까지 확대한 것은 앞서가는 전략이라고 볼 수 있겠다. 가치 기반 소프트웨어공학이라는 분야가 있기는 하나 고객가치에 따라 쉽게 제품의 설계 스펙을 변화시킬 수 있는 소프트웨어의 경우고, 연구개발 전반적으로는 개념이 잘 정립돼 있지는 않다.
최근에 미국에서 비약적인 도약을 하고 있는 애플을 교훈삼아 가치중심 엔지니어링의 개념을 설명하고자 한다. 애플은 시장에 가장 먼저 진입하는 초기진입자가 아니고 적절한 시기에 훨씬 성숙된 고객가치를 높인 제품으로 추격하는 행태를 보인다. 고객의 가치를 높이는 제품, 혹은 연구개발 전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고객의 숨은 요구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애플이 처음 아이팟(iPod)을 출시했을 때 시장에는 이미 수많은 MP3플레이어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려면 상당한 컴퓨터 지식과 불법 음원을 인터넷에서 찾아낼 수 있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했다. 당시의 다른 회사들이 집중했던 성능·소형화 대신 이 제품은 쓰기 쉽고 음악을 쉽게 내려받을 수 있는 기능을 가능케 해 전혀 다른 규모의 시장을 창조했다. 이처럼 미리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고객이 그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알지 못해 발견되지 않은 수요를 대기수요(latent demand)라고 한다. 이 이외에도 디자인을 차별화해 멋진 MP3플레이어를 가짐으로써 멋지게 보이고자 하는 젊은이의 욕망을 잘 파악했다.
두 번째는 혁신기술 사이의 상승효과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아이팟을 보면 혁신기술을 한 가지씩 채택하지 않고, 클릭 휠, 초소형 하드디스크, 발전된 임베디드 운용체계, 아이튠스라는 PC 호스트용 프로그램 등을 한꺼번에 도입함으로써 사용자 편의성 측면에서 기존의 제품과 확실한 차별화를 이룩하고 있다. 또 이 모든 혁신기술이 사용자 편의성이라는 한가지 방향으로 집중돼 부분적인 혁신의 합으로 불연속적인 혁신을 이루어내고 있다.
세번째는 기술의 고객가치 민감성에 주목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혁신기술이 고객가치를 높여 줄 것이라고 하지만 어떤 기술은 고객이 별로 가치를 부여하지 않아서 시장가치가 별로 없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3세대 무선통신의 영상통화기능은 혁신적인 기술이고 비용도 많이 들지만 간단한 기술인 문자메시지에 비해 고객 호응이 없어 수요가 창출되지 않고 있다. 이 상관관계를 고객가치 민감성이라고 부른다. 이 민감성에 주목해 기술개발 리소스를 배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단 이 고객가치 민감성곡선은 선형이 아니고 형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므로 그 변화를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 애플의 최신제품인 아이폰을 보면 여기에 주목한 흔적이 보인다.
네 번째로는 대체기술의 여부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기술개발 경쟁이 심해지면 점진적인 혁신을 통해 경쟁회사들과 집적도, 성능이나 생산비 절감 경쟁에 집중하게 된다. 결국 이런 경쟁에서는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는 비생산적인 경쟁에 돌입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대체기술 여부에 항상 관심을 두어야 한다.
대체기술이란 크리스텐센이 말한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일으킬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내부에서 대체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위험성이 있으므로 전후방의 파트너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 노키아나 애플 같은 기업은 부품이나 기반기술을 공급하는 기업과 장기적인 협력관계를 맺고 당장 사용할 수 없는 기술에도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일반 기업은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나 내부에서 개발하고 있는 기술에만 관심을 갖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파트너를 통한 기술 탐색의 범위가 축소돼 장기적인 경쟁력을 해치게 될 위험성이 있다. 국내 기업들이 이런 트렌드를 잘 파악해 가치중심 기술개발 전략에서 우위에 서기 바란다.
◆오종훈 펄서스테크놀러지 대표·포스텍 기술경영대학원 교수 jhoh@puls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