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태어나고 커가면서 걸음마와 말을 배우게 된다. 내 아이들도 말을 배우면서 “아빠, 이게 뭐예요?”라는 질문을 많이 했다. 조금 더 자라난 요즘에는 “아빠, 이것도 몰라요?”라는 핀잔 어린 말로 바뀌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의 인생이나 삶은 수많은 기억의 덩어리다. 친구나 후배의 결혼식이나 돌잔치뿐 아니라 비즈니스로 만나는 사람과 회사도 늘 잘 외워둬야 한다. 천재감독이라는 닉네임을 안겨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메멘토’에서 주인공 레너드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려 10분만 지나면 그 이전에 경험한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잊혀진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온몸에 꼭 기억할 것을 문신으로 새기고 즉석 사진을 찍어 메모를 남기는 것으로 주변 상황과 인물을 파악한다.
PC의 대중화와 다양한 정보화 기기의 등장으로 우리의 기억도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얼마 전 사무실에서 쓰던 PC가 걸핏하면 멈추더니만 끝내 그동안 주고 받았던 이메일이 몽땅 증발해버렸다. 살면서 어려운 일들을 겪어왔지만 이번 일은 사뭇 다른 느낌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업무와 관련된 중요 메일과 친구와 나룬 메일, 메일에만 남겨진 연락처 등이 사라지면서 마치 머리가 텅텅 비워진 것처럼 며칠간 넋을 잃고 지냈다. 디지털시대에 신종 기억상실증에 걸려버린 셈이다.
이메일의 실종뿐 아니라 휴대폰을 잃어버리거나 고장이 나 저장된 수십 수백명의 연락처가 사라져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PDA나 전자수첩도 마찬가지. 차곡차곡 쌓아놓은 연락처와 중요한 메모가 저장된 첨단기기가 고장나거나 분실되면 누구나 발을 동동 구르며 애를 태우게 된다. 한 친구는 400명이 넘는 사람의 연락처를 담은 전자수첩이 고장난 뒤로는 그 충격의 여파로 지금도 종이수첩만을 고수하고 있다.
정보화시대가 되면서 정보 관리가 더욱 편리해진 것은 분명하다. PC를 활용해 명함과 주소록, 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 검색할 수 있고 여러 종류의 메신저를 쓰면서 원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일상 생활화됐다. 이메일·휴대폰·PC·PDA 등은 어느새 우리 기억의 일부로 자리 잡은 것이다. 실수로 휴대폰을 집에 두고 밖에 나온 날은 ‘메멘토’의 주인공이 기억을 잃어버린 것처럼 하루종일 초조하고 불안하지 않은가.
‘사이버펑크’라는 문학 장르의 창시자로 유명한 작가 윌리엄 깁슨의 소설을 영화화한 ‘코드명 J(Johnny Mnemonic)’.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이 영화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우리의 기억에 관한 보다 파괴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사람의 뇌를 마치 PC의 하드디스크처럼 활용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주인공 쟈니는 비밀정보를 뇌에 저장해 운반해주고 돈을 받는다. 기억용량을 늘리기 위해 뇌에 실리콘 메모리칩을 추가하거나 더 많은 정보를 저장하기 위해 어린 시절의 애틋한 기억마저 지워버린다. 언뜻 들으면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빠른 변화를 보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요새는 인터넷 쇼핑과 금융거래를 위해 공인인증서 파일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이 중요한 파일을 보관하기 위해 조그만 USB 외장메모리와 PMP가 날개 돋친 듯이 팔린다고 한다. 만약 이와 같은 기기를 잃어버리거나 도난을 당한다면 머릿속의 기억을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답답한 기억상실증을 앓아야 한다.
디지털 시대의 신종 기억상실증을 겨냥한 새로운 비즈니스도 성업 중이다. 디지털 기기의 사라진 정보를 살려주거나 미리 따로 보관해주는 이른바 ‘복원’과 ‘백업’ 사업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우리의 기억과 사고는 지금 광속에 비유될 만큼 빠른 디지털 기기들의 도움으로 무한히 확장되고 있다. 이미 계산 능력은 컴퓨터에 맡긴 지 오래고 모르는 정보도 인터넷에 물어보고 찾는 게 정답이 되어버렸다. 수많은 디지털 장치들이 우리와 공생하고 만다. 만약 어느 날 갑자기 PC와 인터넷과 휴대폰이 없어진다면 우리는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마저 생긴다. 우리의 추억은 이제 디지털 사진파일로 기록되고 삶의 궤적은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남겨진다. 우리의 기억과 삶이 온전한 것인지 한번쯤은 뒤돌아보는 여유가 필요할 때다.
◆김종래 파파DVD 대표 jongrae@papadv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