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때이니만큼 ‘검증’이라는 용어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검증이란 ‘어떤 대상의 성질이나 상태 따위를 인식해 증거를 조사하는 일’이라고 사전에 정의돼 있다. 정치권이 인물에 대한 검증 여부를 두고 떠들썩한 가운데 과학기술계에도 때 아닌 검증 바람이 불고 있다. 다름 아닌 ‘사전타당성조사 제도’이다.
올해부터 도입된 사전타당성조사 제도는 500억원 이상의 사업비가 투입되는 대형 국가연구개발사업을 추진하기에 앞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가를 미리 검토해 보는 사전 검증의 성격을 가진다. 한마디로 ‘될 성 부른 나무’를 찾기 위해 떡잎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다.
과학기술혁신본부는 이 제도 도입을 위해 작년에 시범사업을 추진했고 올해 초 과학기술기본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제도를 법제화했다. 한때 국가연구개발예산은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인 눈먼 돈이라는 인식이 정부 부처 내에 팽배해 있었으나, 사전타당성조사 제도의 도입으로 인해 민간 기업의 사업계획서 수준으로 연구개발사업을 기획하지 않는 부처는 아예 예산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구체적으로는 사업 계획의 구체성, 목표 달성 가능성, 국가 전략적 필요성, 정책적 중요성, 경제사회적 파급효과, 경제성 등의 항목에 대해 전문가들의 엄정한 심사를 거치게 된다.
사전타당성조사 제도와 비슷한 게 또 있다. 기획예산처가 주관하고 있는 예비타당성조사이다. 예비타당성조사는 도로·항만·댐 등 대규모 공공건설사업에 대한 사전 검증으로 99년부터 이루어져 왔다. 예비타당성조사를 통해 152개 사업(총사업비 100조원 규모)에 대한 조사가 수행됐고 이 중 54%인 81건이 타당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2003년 말 기준) 50조원에 달하는 예산을 절감한 것이다. 사전타당성조사 제도도 연구개발사업에서 똑같은 역할을 해 줄 것이다.
예비타당성조사가 지난 99년부터 이루어져 온 것을 생각하면 사전타당성조사의 도입은 늦었지만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특히 연구개발사업에 대한 사전타당성조사를 수행하는 것은 주요 선진국 중에서 우리나라가 처음이다. 미국·일본 등에서도 우리의 사전타당성조사 제도의 향방을 주시하고 있다고 하니 조사 전담기관의 일원으로서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낀다.
우리나라의 연구개발예산은 2006년도 기준으로 7조2283억원에 달하며 최근 5년간 8% 이상의 높은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국제핵융합로공동개발사업(ITER), 차세대초전도핵융합장치연구(KSTAR), 우주개발사업, 대형장비사업 등 연구개발사업은 갈수록 장기화·대형화·복합화되고 있는 추세다. 이번에 사전타당성조사 제도가 도입되면서 사업의 기획 단계에서 중간 평가, 성과 관리에 이르기까지 연구개발관리의 전주기를 체계화했다. 좋은 기획을 통해 좋은 성과를 유도하고 이를 기반으로 차세대의 연구개발을 기획해 나가는 이른바 과학기술 혁신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과학기술혁신본부는 사전타당성조사 제도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과학기술 기획·조정·평가 전문기관인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전문성과 노하우를 활용하고 있다. KISTEP은 연구개발사업에 대한 사전타당성조사 전담기관으로서 그동안 국가연구개발사업 조사·분석·평가 및 예산 조정·배분을 지원하면서 축적한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연구개발사업의 속성을 반영한 사전타당성조사 방법론 개발에 힘쓰고 있다.
이번에 도입된 사전타당성조사 제도를 통해 그동안 국가 예산을 방만하게 운영한다는 지적을 상습적으로 받아오던 우리 과학기술계가 서슬 퍼런 검증의 무대에 올라서게 됐다. 소중한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국가연구개발사업이 우수한 성과를 창출해 내기 위해서는 애초에 좋은 떡잎을 골라내는 검증 과정이 꼭 필요하다. 사전타당성조사 대상으로 선정된 관계부처 및 유관기관들에서는 이 조사를 귀찮은 행정 절차로 치부하지 않고 사업의 기획 수준을 한 단계 제고해 사업의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기회로 삼아 주었으면 한다.
◆이상엽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평가조정본부장 sylee@kistep.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