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상보안용 장비에 사용되는 비메모리 반도체를 설계하는 팹리스 기업이 코스닥 상장을 위한 공모주 일반청약을 받았는데 최종경쟁률이 970 대 1을 넘고 청약증거금은 1조6000억원에 달해 임직원 사이에서 웃음꽃이 피었다고 한다. 척박한 환경에서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기업을 공개해 투자자들에게 유망한 기업으로 인정을 받았으니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 우리 팹리스 기업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2003년 팹리스 기업의 평균 매출액이 80억원에 불과했으나 지난해에는 214억원으로 세 배 가까이 늘었고 같은 기간 순이익도 1억3000만원에서 18억원으로 14배나 늘었기 때문이다. 총매출도 같은 기간 6500억원에서 1조5000억원으로 늘어났고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나 IP를 공급하는 관련 기업들도 많이 생겨났다. 이제 팹리스 산업은 명실상부한 산업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팹리스 기업은 아직 많은 한계를 안고 있다. 우선 퀄컴·브로드컴·미디어텍 등 세계 유수의 팹리스 기업에 비하면 규모가 아주 작다. 또 다양한 고객을 확보하지 못해 매출처가 한두 개 대기업에 편중돼 있고 주력 제품도 한두 가지에 불과하다. 특정 대기업의 경영조건과 특정 제품의 시장환경 변화에 의해 기업의 운명이 결정되니 주식시장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지속적인 성장, 발전도 어려워진다. 이런 문제점들은 우리 IT산업이 안고 있는 근본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은행은 ‘주력성장산업으로서 IT산업에 대한 평가와 시사점’이라는 보고서에서 한국의 IT산업을 진단하면서 “우리나라 IT산업은 원천기술 부족 등으로 핵심 부품·소재산업의 발달이 미흡해 제조업에 편중돼 있는 등 부품·소재산업 및 IT서비스업이 고루 발달한 선진국에 비해 구조적으로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완제품 조립가공기술이 평준화되면서 부품·소재가 완제품의 가격과 품질을 결정하는 핵심요소로 부상한 상황에서 미국·일본 등 선진국과 중국 등 후발국 사이에서 넛크래커가 되는 형국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위기를 돌파하고 IT산업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방법은 바로 부품·소재산업을 육성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부가가치가 높은 팹리스 산업의 육성이 절실하다.
우리나라가 IT산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IT부품·소재기업이 취약한 이유는 급속한 산업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장기간의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부품·소재산업보다 진입장벽이 낮은 조립산업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또 국내 대기업들이 서로 무한경쟁을 벌이면서 부품·소재까지 수직계열화하다 보니 부품·소재기업들은 시장을 확대하지 못해 일정 규모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고객사의 경영전략이 변화하면 일거에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정부는 그동안 ‘IT839 전략’ 등 다양한 정책을 통해 부품·소재산업 육성을 위해 노력해 왔지만 변화한 시장환경에 대응하기엔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
기업의 규모가 곧 경쟁력이 되는 규모의 경제화, 단품보다는 토털 솔루션을 요구하는 세트업체 수요 추세의 변화 등 바뀐 시장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정책이 절실히 필요하다. 대기업 간, 대기업·중소기업 간 상생협력을 위해 결성된 상생협력위원회 등도 구호에 그치지 않고 부품·소재기업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길 바란다.
물론 팹리스 기업도 해야 할 일이 많다.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품 포트폴리오의 다양화, 인수합병 등을 통한 규모 확대, 고객군 다양화를 위한 노력 등이 절실하다. 벤처기업으로 출발해 제품 개발과 마케팅까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해 온 팹리스 기업들은 자생능력을 바탕으로 과제를 해결하고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황종범 IT-SoC협회 사무총 jbhwang@itso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