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가 최근 “한국은 인종차별적 요소를 없애고 다인종적 성격을 인정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유엔이 한국사회에 만연한 단일민족 환상, 순혈지상주의, 닫힌 민족주의에 경고를 한 것이다. 한국사회가 유지해온 ‘단일민족’ 이념의 긍정적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단일민족의 정체성은 지난 반만년 동안 600여차례의 외침을 겪을 때마다 단결된 힘을 모으는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고려·조선은 물론이고 일제시대에는 ‘배달민족’ ‘백의민족’이란 이름으로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IMF 경제위기 때 거국적으로 일어난 ‘금모으기 운동’ 역시 단일민족 정신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단일민족, 순혈주의를 다시 한번 고민해봐야 할 때다. 21세기는 글로벌시대다. 다민족·다문화 국가가 세계적인 추세다. 비교적 단일민족체제에 가까웠던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 선진국도 인도·알제리·터키 등의 이민을 받아들이면서 사실상 다민족체제로 전환했다. 프랑스는 이민자 출신이 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으며, 국민 영웅으로 자리 잡은 축구선수 지단 역시 이민 2세다. 종이 다양해야 생태계가 건강하게 유지되는 것처럼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는 것은 세계화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법무부에 따르면 국내 체류 외국인은 이미 100만명을 넘어 우리나라 인구의 2%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50년에는 외국인 비율이 9%를 넘을 것이라고 한다. 또 지난해 결혼한 여덟 쌍 중 한 쌍이 국제결혼이고 농·어촌 남성 10명 중 4명이 외국인을 신부로 맞이했다. 우리나라도 어느새 다인종·다문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는 세계화시대에 경쟁력 확보 측면에서도 다민족·다문화는 오히려 권장해야 할 사항이다. 인종을 넘어 능력 있는 인재를 적극 유입해야 글로벌시대에 국가경쟁력도 확보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1인당 출산율이 1.08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인 점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는 인구감소에 따른 국가경쟁력 약화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최근 방한한 미래학자 존 나이스 빗도 국가경쟁력은 우수한 인적자원에서 나온다고 했다.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기댈 곳은 인적자원뿐이다.
실리콘밸리가 세계 최고 수준의 IT생태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도 첨단기술을 끊임없이 개발해 낼 수 있는 열린 인적자원 확보전략에 있다. 한 해에만 20만명에 육박하는 인도 IT인력이 실리콘밸리로 진출하면서 실리콘밸리의 성장을 견인함은 물론이고 인도 IT산업까지 발전시키고 있다. 우리도 IT코리아를 넘어 글로벌경쟁력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우수한 해외 IT인력을 적극 끌어들여야 한다.
이 시점에서 많은 외국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민정책을 좀 더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미국도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이민정책으로 우수한 인력을 끊임없이 수용했기 때문에 세계 최강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다민족에서 나오는 다양성과 창의성이 국가경쟁력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때마침 정부가 외국 고급인력의 유입을 촉진하기 위해 영주권 제도를 탄력적으로 운용하겠다고 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순혈주의는 다양한 문화적 가치와 창조적 사고의 발현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여러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고 상호인정하는 개방적이고 다양한 문화 속에서 사회는 성숙하고 국가는 발전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로마민족의 경쟁력을 ‘개방성’에서 찾았다. 한국이 동북아 중심국가를 넘어 세계를 선도하는 중심거점이 되려면 개방성이 완전히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공존하며 서로의 가치관과 능력을 만개할 수 있는 제도와 풍토를 만들어 나가야 할 때다.
◆김창곤 한국정보사회진흥원장 ckkim@ni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