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자산업의 역사는 글로벌화의 역사다. 좁은 국내시장에 만족하지 못하는 한국 산업계의 세계 도전기가 그 속에 녹아 있다. 한국 반도체 장비산업의 역사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적인 반도체업체가 포진해 있기는 하나 국내시장에서 일정 수준의 규모에 도달하면, 제2 도약의 기틀은 글로벌시장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 공략은 한국 고객을 만족시킨 최고의 기술력만 갖고는 부족하다. 이미 시장을 점령하고 있는 선진 장비업체와 차별화되는 무엇이 없으면 고착화돼 있는 수요·공급 관계에 파고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선진 장비업체의 견제도 만만치 않다.
나는 테크윙이 해외시장 개척에 처음 나섰던 4년 전을 돌이켜 보게 된다. 오라는 곳은 없었지만 가방에 메모리 반도체 검사장비인 테스트핸들러 카탈로그와 핵심부품을 싸들고 세계 메모리반도체 회사를 찾아 다녔다. 제품에는 자신이 있었으나, 나를 5분 이상 만나주는 바이어는 없었다. 무모하리만큼 밀어붙여 미팅이 성사돼도 애당초 우리 장비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한 회사 바이어는 미팅 중에 하품까지 해댔다.
어쩌면 당연했다. 미국·일본 업체도 아니고, 한국의 작은 신생벤처기업을 비즈니스 파트너로 선뜻 선택한다는 자체가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안으로는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그들이 좀 더 원할 만한 품질과 성능을 갖추기 위해 스스로를 담금질했고, 밖으로는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한 발 더 뛰었다.
메모리 반도체 제조현장의 절실한 기능을 수렴한 테스트핸들러 개발에 주력한 결과, 선발기업인 일본 어드밴테스트보다 처리능력이 앞선 장비를 3세대(x128·x256·x512) 연속으로 출시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대만시장부터 한국·미국·일본·유럽 및 아시아권을 아우르는 메모리반도체 제조회사를 고객으로 확보했다.
그리고 지난해, 테크윙이 세계 반도체 후공정장비업계와 반도체업계에서 확실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계기가 찾아왔다. 어드밴테스트가 우리를 상대로 특허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당시 회사 영업담당 임원들은 마치 큰일이 난 것처럼 걱정했지만 나는 그 보고를 듣고 내심 기뻤다. 4년 전 어떤 바이어도 만나주지 않던 회사가 이제 세계 1등의 견제를 받는 위치에까지 오른 것에 뿌듯함마저 들었다.
특허소송은 이미 예견했던 일이었고, 결과도 특허법원에서 모두 승소해 오히려 그들이 세계시장에 우리를 홍보해 주는 감사함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진정한 세계화의 첫걸음을 디딘 셈이다.
과도기의 국산 반도체 장비가 왠지 투박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만을 보고 장비 국산화의 인큐베이팅 환경을 만들어 준 국내 반도체 소자업체들이 있었기에 현재 20% 남짓한 수준이라도 장비 국산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메모리 용량이 확대되면서 후공정이 반도체 생산원가에 미치는 비중이 커졌고, 경쟁력 강화의 열쇠는 테스터의 효율을 좌우하는 테스트핸들러 장비에 있다. 최근 테스트 경향은 초고속, 고성능을 요구하고 있기에 테스터핸들러는 더욱 핵심장비가 되고 있으며 전 세계 메모리시장의 40%를 점유하고 있는 국내에서도 이제는 테스트핸들러를 비롯한 세계적인 국산 반도체 장비들이 확고히 자리매김해 활용되고 있다.
한국반도체 장비산업은 오늘도 저변을 넓히며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검증된 장비가 세계 시장으로 파고드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이제 우리 장비업계가 할 일은 국내외에서 창출해 낸 이익을 투자로 돌려 더 좋은 장비를 개발하고, 이를 다시 국내 소자업체에 납품해 기술을 검증하고 해외시장을 장악해 나가는 ‘선순환’을 이어가면서, 규모면에서도 글로벌장비업체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는 각각의 반도체 장비업체가 반도체 산업 전반의 튼실한 구조를 이루게 하는 소중한 소명이며, 진정한 의미의 상생이다.
대한민국 반도체 장비산업도 반도체소자산업처럼 세계시장을 주도할 날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거세지는 해외 선진장비업체의 견제는 그날이 임박했음을 방증한다. ‘베스트! 메이드 인 코리아!!’는 시작됐다.
◆심재균 테크윙 사장 jaegyun.shim@techwi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