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의 세계적 거물 루퍼트 머독은 수년 전 영국의 공영방송 BBC에 “프로그램들이 너무 재미가 없어서 박물관에나 보내야 할 것”이라 혹평했다. 미디어의 공적 가치보다는 콘텐츠의 재미를 통한 수익창출에 열중하는 그로서는 국민으로부터 비싼 시청료를 받으면서 재미도 없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영하는 BBC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튿날 존 버트 BBC 사장은 머독 소유의 ‘더 타임스’에 반박 기고문을 냈다. 그는 “영국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므로 BBC의 프로그램을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은 당연하며 우리는 계속 재미없는 프로를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기꺼이 많은 금액을 공영방송 시청료로 지급하는 영국 국민과 정부나 정파 그리고 ‘상업’에서 완전히 독립된 BBC가 갖는 자존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머독의 지적대로 다소 재미는 없을지 몰라도 BBC의 교육·다큐멘터리와 같은 방송 콘텐츠는 영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며 유통돼 수익도 크게 올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수익과는 별개로 조직이 방만해지려 하면 여지없이 구조조정 계획을 수립하는 등 뼈를 깎는 자구책을 마련해 발표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도 KBS로 대표되는 공영방송이 있다. 민영 지상파방송사도 공익을 내세우며 사업을 한다. 하지만 여전히 ‘공영’이라 인정받을 만한 방송사를 찾는 게 우리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사실 세계적으로 낮은 수준의 수신료로 방송의 공익성만 요구하는 것도 문제는 있다. 지상파 방송 수신료 인상을 추진하는 데 세계적 공영방송을 얻기 위해서라도 단계적 개선이 필요한 부분임은 방송계나 미디어 관련 시민단체도 인정한다.
물론 여기에는 공영방송으로서의 높은 도덕성과 책임감도 함께 부여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각계에서 방만한 경영을 향해 받고 있는 질타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하며 확보된 재원은 사업 확장에 쓸 것이 아니라 상업화되지 않도록 광고를 없애고 BBC의 프로그램처럼 ‘재미없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투자해야 할 것이다.
또 스스로 공영방송을 자처하는 민영 지상파방송사도 하루빨리 정체성을 고민해보고 진로를 정해야 할 것이다. 현재 양질의 공익성 프로그램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곳이 지상파 방송국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인정할 만하겠지만 지상파 스스로 ‘지상파=공영방송’이라는 착각의 늪에 빠져서는 곤란하다. 오락물이 넘쳐나고 광고수익을 위해 시청률 중심의 편성전쟁을 벌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국민에게 여전히 ‘공영방송’은 먼 나라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공영방송이 바로 서서 방송매체의 중심이 돼야 상업방송 매체도 좀 더 분발할 수 있을 것이다. 공영방송이 수익확대를 위해 다채널방송이나 중간광고 도입 등을 주장하고 나서며 상업방송과 경쟁하기보다 스스로 구체적 개혁방안을 제시하고 실천해 간다면 국민은 더 큰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지상파의 공영성 확보를 명분으로 허용된 낮방송에 각 방송국은 편성표의 절반 이상을 오락물로 채워 광고수익 채우기에 급급했다. 그러면서 유료매체에서만 실시하는 중간광고나 다채널방송을 요구하는 지금도 역시 명분은 ‘공공성 확보를 위한 재원 마련 차원’이다. 수익이 있어야 공익적인 방송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더라도 그간의 지상파방송사의 태도로 보아 내줘야 할 혜택이 어디까지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의 개혁도 필요하겠지만 각 방송사가 위상에 맞는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규제기관도 나서야 할 때다. 하나하나의 현상에 급급해 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공영방송과 상업방송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차별화된 의무부여와 지원범위를 설정해 방송이 국민에게 양질의 보편적 서비스와 다양한 선택적 즐거움을 동시에 제공할 수 있도록 지도해 가야 한다. 공영방송이 올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
◆서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