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트렌드]멀티플레이어의 시대

[메가트렌드]멀티플레이어의 시대

 얼마 전 나와 친분이 있는 한 교수가 푸념 섞인 말을 했다. “교수가 학생만 잘 가르치고 연구만 잘 하면 되던 세상은 끝났다”는 것이다. 후학을 양성하고 연구 업적을 생산하는 일이 교수의 주된 일 일 텐데 어찌 된 일인지 몇 년 전부터는 다른 일도 다 잘해야 살아남을 수가 있게 됐다는 얘기다.

 대표적인 것이 행정업무라고 했다. 요즘 대학에서는 연구사업에 지원하고 또 실적을 내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때 가장 많이 요구되는 것이 바로 행정서류를 꼼꼼히 꾸미는 능력이다. 또 연구사업을 받아오기 위해서 평소에 여러 사람들과 친분을 쌓아둬야 하기 때문에 사람 잘 만나는 능력이 교수에게도 요구되고 있다. 그 교수는 자기는 공부만 잘할 뿐 다른 면에는 소질이 없어 자기 자리가 항상 불안하다고 했다. 한마디로 자신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멀티플레이어’가 못 된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만 잘해도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적지 않은 영역에서 해당되는 얘기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급속하게 진행된 사회 전반에 걸친 영역간 경계의 약화는 모든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를 요구하고 있다. 영역 간 경계 약화에 따라 하나의 영역에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들은 도태될 위험에 빠지게 됐다. 회사에서 주어지는 업무 역시 그 다양성의 범위가 커지고 있는데 주어진 업무를 두고 ‘그것은 내 분야가 아니야’라는 변명이 더는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의 전문지식은 물론이고 외국어 활용 능력, 매니저로의 능력, 파워포인트·엑셀과 같은 사무용 프로그램도 잘 다룰 수 있는 정보처리 능력 그리고 타 분야의 지식들 또한 갖춰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교육자이면서도 컨설팅을 하고, 언론학자이면서도 문화학자 못지않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가수면서도 배우의 자질도 갖추고 있어야 성공 가능성이 더 높아지고 있다. 축구에서도 이제 공격수·수비수가 따로 없이 모두가 상황에 따라 공격수가 될 수 있고 수비수도 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고 있지 않은가.

 다양한 분야에 적응하는 능력은 IT가 있었기에 보다 쉽게 배양할 수 있었다. IT는 과거에는 제도권 교육기관에서만 가능했던 지식학습의 문을 넓게 열어줬다. IT로써 모든 이들은 학습할 기회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게 됐으며 멀티플레이어로서 스스로를 재무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타 분야에 대한 요약된 지식, 쉽게 풀이된 지식은 인터넷지식검색을 통해서 학습할 수 있으며 보다 심층적인 지식은 온라인 동영상 강의를 통해서 얼마든지 학습할 수 있게 됐다.

 멀티플레이어들은 IT를 이용한 지식학습에 능숙하다. 이들은 특히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의 업무가 주어져도 IT를 이용해 관련 지식을 검색하고 이를 조합,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을 갖춘 이들이다. 이러한 지식, 즉 필요한 지식들이 어디 있는지를 잘 알고 있으면서 남들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찾고 또 찾은 지식을 새롭게 조합하는 능력이 바로 검색 능력이다. 이는 멀티플레이어가 반드시 지녀야 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멀티플레이어의 시대는 사실 피곤한 시대다. 과거에는 한 가지만 잘해도 됐는데 이제 여러 가지를 잘해야 하니 사람들은 더욱 많은 중압감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 멀티플레이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어쩔 수 없이 전문성 약화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과거 일본의 ‘장인정신’이 경제발전에 기여한 점을 잘 기억해볼 필요가 있다. 멀티플레이가 되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든다. 이 문제는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는 소지 또한 갖고 있다. 멀티플레이어의 증가는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하는데 결국 정규직·비정규직 문제와도 첨예하게 얽혀 있기도 하다. 멀티플레이어의 시대, 이미 시작됐고 민첩하게 대응해야 할 메가트렌드다.

최항섭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연구위원 jesuishs@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