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잘 듣기’ 지식국가의 시작

[ET단상]‘잘 듣기’ 지식국가의 시작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를 철칙으로 여기는 사람을 가끔 만난다. 자신이 조금만 손해본다 싶으면 상대방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일단 목청부터 돋우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인체는 나의 말보다 남의 말을 훨씬 잘 듣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자신의 말소리가 귀에 들어오면 특정 근육이 움직여 진동을 최소한으로 막고 반대로 타인의 말이 들어오면 근육을 풀어 소리의 진동을 한껏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말하기’ 이전에 ‘듣기’의 소중함을 먼저 가르치려는 창조주의 심오한 뜻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과학기술계에 종사하다 보면 인간의 귀가 왜 이렇게 만들어졌는지, ‘듣기’가 왜 그토록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낄 때가 많다.

 흔히 과학기술 연구개발의 기저라고 하면 창조적인 두뇌와 노력·첨단장비 등을 떠올린다. 실제로 과학기술자도 그렇게 생각할까. 여러 설문조사를 보면 과학자는 오히려 타인의 연구 성과를 ‘듣기’, 다시 말해 지식정보를 수집하고 활용하는 것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미국 과학재단은 미국의 연구자가 지식정보를 이용해 연구 과제를 선정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데 전체 연구시간의 무려 40%를 소요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고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은 국내 연구자 역시 23% 이상의 연구시간을 정보에 할애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2003년 산업기술진흥협회 조사 결과를 봐도 연구자는 기술력과 우수인력 확보보다 정보력이 연구 결과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1세기에는 ‘선진국·후진국’이라는 말 대신 ‘지식국가·지식우위국가·최고 지식국가’라는 표현이 더 많이 사용될 것이고 지식 활용 수준이 한 나라의 경쟁력을 재는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학기술계에서도 정보를 수집·분석해 효율적으로 연구자에게 제공하는 능력이 핵심적인 국가경쟁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중요한 지식정보 구축을 위해 국가 차원의 과학기술 지식정보 인프라 구축을 수행하고 있는 KISTI는 최근 지식정보서비스에 ‘지속가능(sustainable)’ 개념을 도입했다. ‘지속가능’이란 일반적으로 미래세대의 발전 가능성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데 나는 이를 무한경쟁 시대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생존 전략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보서비스에서의 ‘지속가능’은 어떻게 가능할까. 무엇보다 정보이용자의 눈높이에 맞춰 서비스 수준을 끊임없이 진화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기술자가 어떠한 연구 패러다임 속에서도 ‘듣기’에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KISTI가 연구자가 자발적으로 정보를 개방·공유해 정보 활용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정보서비스에 웹2.0 개념을 도입하고 컴퓨터가 정보의 뜻을 이해하고 조작할 수 있는 차세대 지능형 웹인 시맨틱 웹 기술로 ‘고객이 원하는 정보만 족집게처럼 정확하게 집어서 서비스해주는 체계’를 갖춰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정보이용자가 ‘매듭 없는(seamless)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원스톱 정보제공시스템, 원하는 정보에 언제 어디에서나 접근할 수 있는 사이버 정보공간(infosphere) 구축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혁신으로 연구자의 기대치를 한발 앞서 만족시키는 것이야말로 지속가능한 정보서비스를 구축하고 과학기술 국가경쟁력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첩경이다.

 국가정보화지수 세계 3위, 과학경쟁력 7위, 디지털접근지수 1위 등의 수치가 보여주듯 우리나라는 이미 정보강국에 진입해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수준에 만족하고 머물러 있는 것만큼 국가발전에 장애가 되는 것도 없다. 지속가능한 정보서비스 혁신으로 대한민국이 ‘듣기’를 잘하는 나라, 세계 최고의 ‘지식우위국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김석영·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선임연구부장 sykim@kist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