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 분야의 한 해를 결산하는 글로브콤 50주년 기념 통신학술대회가 지난달 26일부터 30일까지 5일간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렸다. 글로브콤은 회원 수만 4만5000명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통신학술 모임이다. 행사에는 교수와 연구원·기업체 CEO 등을 포함, 총 1500여명이 참석했으며 약 1000편의 우수한 논문이 발표됐다.
29일 늦은 저녁, TV에서 재방송하는 1974년도 세계 권투 헤비급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의 권투시합이 눈길을 끌었다. 34년 전에 있었던 명경기다. 지금은 63세로 뇌에 손상을 입어 알츠하이머 수전증으로 손을 심히 떨고 있는 한낱 노인네가 됐지만 당시의 알리는 영원한 젊은 청년이었다.
경기 초반부터 가슴과 배·얼굴 등에 조지 포먼의 강력한 주먹세례가 쏟아졌고 알리는 언제 무너질지 몰랐다. 그런데 경기가 중반으로 접어들자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났는지 쏜살같은 단 한 방의 주먹으로 KO승을 거뒀다. 경기 내내 그는 발뒤꿈치를 들고 싸웠다. 상대방이 자그마한 틈을 보이면 언제든지 뛰어나가겠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나비같이 날아 벌같이 쏜다’는 말이 유행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 단 한 방의 주먹으로 세계인은 미치도록 한호하며 알리를 외치고 있었다. 그 환호 장면에 김정과 이병기가 오버랩됐다.
27일 저녁, 세계 도처에서 온 1000여명의 참가자가 모인 힐튼 국제볼륨센터에서는 글로브콤 50주년을 기념하는 축하초청연설이 있었다. 초청 인사는 AT&T 벨랩의 김정(한국명 김종훈) 박사였다. 세계적인 행사인 글로브콤 50주년 학술대회에 한국인이 초청연설을 하고 있었다. 연설을 하는 김정 박사도 영광이었겠지만 청중으로 자리를 같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했다.
그는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전기 및 컴퓨터 분야를 전공, 3년 만에 졸업했다. 또 7년 동안 미 해군에 근무하면서 존스홉킨스 대학과 메릴랜드 대학에서 각각 기술경영 분야 석사와 신뢰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에는 유리시스템 회사를 설립하고 통신데이터 전송 기술 분야인 인터넷 액세스 이기종 간 접속 모드를 개발했다. 동기와 비동기 간 매체 접속을 유연하게 연결해 신뢰도를 향상시킨 기술이다. 이 기술을 바탕으로 그는 유리시스템을 1997년에 미국 내 1위 기업으로 키웠고 이듬해 회사를 루센트에 11억달러(약 1조원)에 매각했다. 하지만 그는 2005년 AT&T 사장으로 돌아온다. 한발 먼저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그를 통신 분야의 세계적인 거목으로 우뚝 서게 한 것이다. 유선과 무선과의 접속. 동기와 비동기 간에 유연한 접속스위치. 이는 인간관계의 접속과 다름이 없다. 부드러운 접속과 10년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김정을 세계통신 분야라는 사각링 위의 알리로 부각시켰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아닌가!
27일 점심 때는 우수 논문 발표자의 포상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이병기 서울대 교수가 시상자로 나섰다. 이 교수는 한국 저널인 제이시엔 및 미국 전기전자학회와 공동으로 스티브 웨인스테인 박사에게 글로벌서비스상을 수여했다. 제이시엔은 이 교수가 지난 99년 한국통신학회와 공동으로 창립한 국내 유일의 통신네트워크 분야 SCI 저널이다.
이병기 교수는 한국의 공학기술을 미국에서도 인증받도록 한 공학기술인증(에벡)을 만들어 한국의 공학 교육과 연구내용을 세계에 알리면서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최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현재 미국 전기전자학회 통신 분야 부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내년에 있을 회장 선거에 출마한다. 물론 선거 과정에서 인종차별 및 미국과 유럽의 텃세 등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하지만 이 교수 특유의 부드러움과 폭넓은 인간관계로 잘 풀어나가리라 믿는다.
알리는 육중한 몸집이지만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한 방으로 세계적인 영웅이 됐다. 김정과 이병기는 비록 알리처럼 육중한 체구는 아니지만 남들보다 한발 앞서 생각하는 소프트한 머리로 세계인의 이목을 끌고 있다.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이들 두 사람이 통신 분야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알리가 돼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문호 전북대 교수 moonho@chonb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