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직 인수위의 영어 공교육 정책을 놓고 토론 열기가 뜨겁다. 이른바 ‘국내파’로서 영어권 나라에 살다보니 영어에 맺힌 한도 많고 겪은 일도 많다.
영국과 미국의 영어가 발음, 억양, 여러 가지 표현, 단어의 쓰임새 등에서 많이 다르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영국 사람이 ‘제대로’ 굴러가는 미국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 당혹스러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게다가 유럽 대륙 사람들, 특히 유럽통합 이후 많은 동유럽계 근로자들이 영국에서 일하다 보니, 미국물 먹은 친구들에게 “왜 영국 사람들이 내 영어를 못 알아듣느냐”는 질문을 받는 게 다반사다. 미국 영어만 다른 것이 아니고 스코틀랜드·호주·인도·필리핀·아랍계 영어가 다 다르고, 유럽인의 영어도 나라마다 모두 다르다. 당연히 한국인·중국인·일본인의 영어도 다르다. ‘글로비시(국제화된 영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여러 종류의 영어가 있더라도 서로 소통하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다. 쉬운 단어와 평이한 문장 구조를 사용해서 명확하게 말하면 된다. 세계를 상대하는 BBC의 콘텐츠들은 난해한 표현을 최대한 배제한다.
각양각색의 억양과 발음은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콜센터 영어’인 인도식 영어에 친숙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영국 사람도 국제화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비즈니스를 하다 보니 ‘다른 영어’와 소통하는 데에 그 나름의 노하우가 생긴 듯하다. ‘다른 영어들’의 영향을 받아 본토 영어도 진화한다. 80년대 호주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모든 말의 끝을 올리는 호주식 억양이 대유행을 했다. 90년대 이후에는 미국 시트콤과 드라마가 방송을 점령하는 등 문화적 영향을 받고, 교류도 많다보니 미국식 영어가 득세하고 있다. 미국식 표현이 혼용되고, 발음도 다소 부드러워지는 식이다.
생활이나 관광을 위해서는 ‘말하기’가 중요하지만 단순한 말 몇 마디에 지나지 않는다. 비즈니스나 과학연구를 위해서 말하기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읽기와 쓰기다. 읽기야 쉽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자국어 수준으로 빠르게 한눈에 전체를 파악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는 꽤 오랜 투자가 필요하다. ‘영어로 제대로 글쓰기’는 유창하게 말하는 것 이상으로 어렵다. 영어는 매우 논리적인 언어고 문법 체계도 단순한 편이라, 현란한 미사여구나 참신한 문장을 고집하지 않고 평이하게 쓰면 된다. 영국인들도 간결·평이한 영어(plain english) 글쓰기를 강조한다. 내 영국 친구 하나는 “정책 보고서를 써야하는데 평이한 영어 글쓰기 능력이 부족해서 고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웹상의 정보는 대부분 영어가 중심이 돼 있다. 특히 사용자의 참여를 핵심으로 하는 웹2.0의 시대에 수많은 블로그·UCC·포럼 등에서 영어가 공용어이다. 웹2.0 개념를 선도했고 최근 위키노믹스(개방형 사용자 참여 경제)라는 신조어까지 만든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무려 90여개 언어로 서비스되는 것을 넘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도록 ‘간단 영어’ 버전(simple.wikipedia.org)을 키워가고 있다.
사용 인구 기준으로 영어는 세계 4위에 지나지 않지만 비즈니스와 인터넷의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세계인에게 ‘원어민 수준의 말하기 능력’을 요구하는 대신 영어 스스로가 쉬워지고 세계인의 소통을 도울 수 있도록 발전하고 있는 셈이다. 웹2.0의 시대에 인터넷 공간에서는 원어민 수준의 현란한 영어실력을 뽐내봐야 전 세계 독자들의 외면을 받기 십상이다. 영어가 자국어인 사람들, 그리고 여러 다국적기업, 국제기구 등도 각종 서류와 자료들을 간결·평이한 영어로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원어민 수준의 말하기 능력이 더 중요할 지, 글쓰기의 기본 논리를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할 지 차기정부가 고민해 보기 바란다.
<박상욱 박사/서섹스대 과학기술정책연구단위(SPRU) Sangook.Park@sussex.ac.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