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재계의 인수합병 열풍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연초 인수합병 시장에서 가장 대어라 할 수 있는 대한통운 인수전에 대기업 4곳이 경합을 벌였다. 향후 새 주인을 찾는 굵직한 기업만 10여곳에 이르는 등 국내 인수합병 시장의 급성장은 명약관화다.
해외 인수합병 시장은 이미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금융정보 업체인 톰슨파이낸셜 집계에 따르면 지난 2000년대 초반 정보기술(IT) 버블 붕괴 이후 바닥을 쳤던 전 세계 인수합병 시장 규모가 지난 2003년 1조6400억달러에서 2006년 4조4470억달러로 큰 폭의 성장을 기록했다. 이 같은 폭발적 성장은 인수합병이 산업규제 완화 및 컨버전스화 등에 따른 경쟁 심화, 연구개발(R&D) 투자비용 급증 등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장 환경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글로벌 통신·네트워크장비 업체인 시스코는 지난 20년간 110여개의 소규모 유망 벤처기업을 차례로 사들이며 기업의 핵심 역량을 강화했다. 1993년 경쟁기업이 데이터 전송시스템을 개발하자 시스코는 곧바로 인터넷 데이터 전송시스템 개발 선두업체인 크레센도커뮤니케이션을 8900만달러에 사들였다. 이 결과 크레센도커뮤니케이션은 인수 2년 만에 연간 5억달러 이상의 신규 매출을 안겨주며 시스코의 성장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시스코는 인수합병으로 회사가 갖고 있지 않은 신기술을 꾸준히 확보해왔다. 그래서 시스코는 인수합병이 아니라 인수개발(A&D)을 한다고 말한다.
국내 IT업체의 경쟁상대인 대만 기업들의 인수합병 바람도 거세다. 대만 1위의 LCD 업체 AU옵트로닉스(AUO)는 4위인 콴타디스플레이(QDI)와 합병을 성사시켰다. 그 결과 AUO는 휴대폰 등에 쓰이는 중소형 LCD패널(TFT LCD) 시장에서 세계 1위에 등극했다. 기술 속도가 빠르고 경쟁이 치열한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단일기업이 모든 분야의 기술을 겸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전략적 제휴 및 인수합병으로 성장과 경쟁력 강화를 추구한 것이다.
주목할 점은 우리나라보다 인수합병에 보수적이던 일본 등 경쟁국가도 이제는 세계의 흐름에 발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1995년 531건이던 일본 기업의 인수합병은 2000년 1645건, 2006년에는 2775건으로 10년 사이 5배 이상 급증했다. 이 중에서도 중소벤처기업 간 인수합병이 최근 활기를 띤다.
우리는 인수합병에 두 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다. 즉 산업 육성을 위해 인수합병 활성화가 중요하다는 긍정적 측면과 인수합병을 통한 머니 게임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건을 보는 부정적 측면이다.
안타까운 것은 긍정적 요인보다 부정적 요인에 더 강한 선입관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 기업은 인수합병으로 기업을 살리고 산업을 키운 10건의 윈윈 사례보다 과거 정부 주도의 빅딜, 경영권 분쟁, 실패사례, 벤처비리 등 부정적 사례 한 건을 기억하는지 모른다.
이제는 인수합병의 역기능보다 순기능을 강조할 때다. 인수합병은 산업의 파이를 키우고 구조 개선의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수합병을 통해 업체간 중복투자를 줄이고 기술을 보완, 발전시켜 급변하는 시장의 요구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은 이제 하나의 경영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 전문가들도 과거의 오류를 실패자산으로 인식하고 인수합병으로 외부역량의 내부화를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의견을 모은다. 물론 인수합병을 추진할 때는 구조조정, 신규진출, 사업시너지, 기술획득 등의 목적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새 정부가 추진 중인 출자총액제 폐지, 지주회사 관련 규제완화, 금산분리 완화 등으로 국내 인수합병 환경은 눈에 띄게 개선될 전망이다. 2008년에는 이명박 정부의 시장주의 원칙에 걸맞게 중소기업들이 인수합병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불식시키고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길 기대해 본다.
이현규 모빌링크텔레콤 대표 hklee11@molink.co.kr